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춘실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거주자가 없어 건물 일부가 축사로 쓰이는 등 멸실 직전에 있다. |
| 정의 |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박춘실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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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박춘실(朴春實, 1875~1914)의 원래 이름은 동식이고 춘실은 호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지금의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당시 백암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구국의 길을 모색하던 그는 이듬해 4월 최익현의 순창 거의에 참가하였다. 최익현 등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 몇 사람을 규합하여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무기를 확보한 뒤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6년 가을, 계북면 양악마을에서 문태서(文泰瑞)를 만나 함께 구국을 위한 항전을 맹세하고 덕유산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덕유산 일대에 웅거하면서 이후 수년간 경남북 및 전북 등지를 무대로 왜적과 60여 회 교전 또는 습격 등을 감행하여 수백의 적병을 살해하였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1909년 5월 계북면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전주감옥에서 복역 중 탈옥하려다가 실패하였다. 후일 대구감옥으로 이송된 뒤에는 옥벽을 파괴하고 100여 명의 동지들을 탈옥시킨 뒤 자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박동식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09년 6월 4일. 「박동식 판결문」, 대구공소원, 1909년 7월 17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800쪽. 전북향토문화연구회,『전북의병사』하, 1992, 38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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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용담군 이동면 백암리 |
|---|---|
| 주소 | 전북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 1227 |
|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백암길 55-4 |
| 위치 고증 | 「박동식 판결문」에 관련 사실과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지번은 같은 마을에 사는 향토사학자 이상순(92)의 증언을 통해 확인하였다. |














박춘실 집 입구와 사랑채
박춘실 집 전경
박춘실 집 본채 터
박춘실 집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