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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전해산 집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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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이전의 가옥은 헐리고 지금은 양옥이 들어서 있다.
정의 군대해산 후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전해산이 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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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내용 전해산(全海山, 1878~1910)의 본명은 기홍(基泓),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海山)이다. 임실군 둔남면(현 오수면) 국화촌에서 출생하여 6살 때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로 이주하였다. 1906년 6월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의병을 일으키자, 전해산도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 이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무장투쟁에 미숙한 유생들이 대다수여서 이내 귀향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고령의 나이를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7년 8월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같은 고향 출신의 이석용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의병을 일으킬것을 의논하였다. 이 때 기삼연이 전라남도 영광에서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이석용과 더불어 종사가 되었다. 후일 이석용이 결성한 의병창의동맹의 참모에 기용되고, 조경환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조경환이 전사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전투를 지휘하였다. 경성결사대의 간부였던 정원집이 유배지에서 탈출하자, 그를 선봉장으로 삼아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조직하고, 광주·장성·함평·영광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후 남원 고래산(古萊山)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중, 1910년 예전에 알고 지내던 조두환(曺斗煥)의 밀고로 일제에게 붙잡혔다. 그해 7월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대론리 앞산에 안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신한민보』, 1909년 3월 17일, 「의병소식」.
『신한민보』, 1909년 4월 7일, 「의병갱기」.
『신한민보』, 1910년 3월 9일, 「전해산 절창」.
「전수용 판결문」, 대구공소원, 1910년 7월 9일.
「전수용 판결문」, 고등법원, 1910년 8월 20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70, 593-59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2-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863-893쪽.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전북의병사』하, 1992, 266쪽.
전북지역독립운동추모탑건립추진위원회, 『전북지역독립운동사』, 신아출판사, 1994, 229-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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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주소 전북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67
도로명 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성암길 69-9
위치 고증 「전수용 판결문」에는 주소가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전해산이 태어난 곳이다. 그 뒤 장수군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위치는 현지 주민 강화엽(84)의 증언을 통해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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