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일두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건물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조만간 폐가로 변할 위기에 처해 있다. |
| 정의 | 일제시기 만주 및 상하이 등지에서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한 김일두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한유생독립단/대한민국임시정부 |
| 관련 인물 | 민긍호(閔肯鎬) |
| 관련 내용 |
김일두(金一斗, 1891~1967)의 자는 동수(東秀), 호는 추산(秋山)이며, 이명은 김진동(金鎭東)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국권회복의 뜻을 굳힌 그는 1907년 원주의 민긍호(閔肯鎬)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가산을 정리하여 영국인이 경영하는 태화상회(泰華商會)로부터 400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전국의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만주 관전현(寬甸縣) 대빈구(大濱溝)에서 천도교 시교원(施敎員)·참교(參敎) 등을 역임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대한유생독립단(大韓儒生獨立團)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1921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3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1926년 7월 전북 김제에서 다시 체포되어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김일두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진동 판결문」, 1921년 5월 6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진동 판결문」, 1921년 6월 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6년 7월 10일, 「金堤에 拳銃靑年, 가정부와 개벽사원」. 『신한민보』, 1926년 8월 12일, 「지리산에 군사를 두어 부호의 기부를 받아 갔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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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동심리 636 |
|---|---|
| 주소 | 전북 순창군 동계면 동심리 추동마을 636 |
|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추동길 107 |
| 위치 고증 | 「김진동 판결문」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김일두와 육촌간인 김주곤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김일두 관련기사(『동아일보』, 1926년 7월 10일)
김일두 집 동측면
김일두 집 서측면
김일두 집 원경
김일두 집 문간채
김일두 집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