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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기산도 은거지 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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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열투쟁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가옥은 멸실되었고, 현재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의 1906년 오적암살단을 주도하였으며,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여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였던 기산도가 은거했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관련 조직 오적암살단/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인물
관련 내용 기산도(奇山度, 1878~1928)는 전남 장성 출생으로 이명은 기산도(奇山濤)이다. 한말 장성의병에 가담했던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장남이자, 의병장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의 종손(從孫)이며, 의병장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기도 하다.

1900년대 초반 상경한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5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오적암살단을 조직하여 1906년 2월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을 습격,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그는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순종의 특사로 1907년 말에 석방되었다.

그후 나라가 망하자 1916년에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친척 기하요(奇夏堯)를 찾아가 당오리에 자리를 잡고 낮에는 호구지책으로 노동을 하고, 밤에는 사랑방에 서당을 열어 인재양성에 힘썼다. 1919년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다시 광복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며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모금하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그는 두 번이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다리를 절었다. 1928년 12월 4일 그는 유언으로‘유리개걸지사 기산도의 묘(流離丐乞之士奇山度之墓)’라는 묘비를 세워달라고 부탁한 후 숨을 거두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김철 등 7인 판결문」, 1920년 5월 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대한매일신보』1906년 2월 23일,「논설 : 이씨피자속론」.
『동아일보』, 1920년 8월 6일,「軍資募集員 奇山度는 三年, 광주법원에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1970, 32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7, 1976, 14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 1971, 43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9, 1975, 386쪽.
고흥군지편찬위원회,『고흥군사』, 2000, 479~4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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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주소 전남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149-1
도로명 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당곤길 13-2
위치 고증 「김철 등 7인 판결문」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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