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청도역 부근 군용열차 전복 의거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기타(철도) |
| 상태 | 변형 / 철로에는 여전히 기차가 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건널목은 폐쇄되었고, 새로 설치된 지하도로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
| 정의 | 1931년 11월 만주로 파견되는 일본군과 무기를 실은 군용열차를 전복시키려 하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1.11.19 청도역 군용열차 전복기도사건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박근이(朴根伊)/추진구(秋振求)/전팔용(全八龍) |
| 관련 내용 |
청도군 고수동의 박근이(朴根伊)·추진구(秋振求)·전팔용(全八龍)은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이에 맞서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31년 11월 18일 밤 만주로 파견되는 일본군과 무기를 실은 군용열차가 청도역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이를 전복시켜 파괴하자고 결의하였다. 이들은 김광조(金光祚) 집 부근에서 길이 약 30㎝, 폭 약 21㎝, 높이 약 15㎝, 중량 16㎏의 돌을 옮겨왔다. 그리고 이를 선로 내의 침목(枕木) 위에 얹어놓고, 건널목 서편 배인상(裵寅相)의 집 앞에서 열차가 달리다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11월 19일 오전 0시 22분 열차가 청도역을 출발하여 27분 건널목을 통과하였다. 이 돌은 열차 제동장치에 걸려 약 50m 정도 끌려갔으나 열차를 전복·파괴시키지는 못했다. 선로를 경비하던 철도보선공부(鐵道保線工夫)가 이를 발견하고 역장에게 보고하였다. 경찰의 조사로 전모가 밝혀지고, 이들은 1931년 12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7형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
| 참고 문헌 |
「박근이 등 3인 판결문」, 1931년 12월 1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31년 11월 22일, 「 군용열차의 전복을 계획, 경부선의 청도부근에서, 범인 삼명은 피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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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대성면 고수동 |
|---|---|
| 주소 | 경북 청도군 청도읍 고수4리 1043-2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박근이 등 3인 판결문」과 『동아일보』 1931년 11월 22일자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위치는 의거에 참여했던 추진구의 아들 추정원의 증언을 토대로 확인하였다. |














군용열차의 전복의거 관련기사(『동아일보』, 1931년 11월 22일)
청도역 부근 군용열차 전복의거지 원경
청도역 부근 군용열차 전복의거지 후면
청도역 부근 군용열차 전복의거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