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노병대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손자 노진영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집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포도밭으로 변하였다. |
| 정의 | 의병항전을 펼치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단식 순국한 노병대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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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노병대(盧炳大, 炳稷, 1856~1913)는 후재(厚齋) 극신(克愼)의 후손이다. 1856년 화령면(化寧面) 관제리(官堤里)에서 출생하였다. 성재(省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889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905년 그는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이용원(李容元)으로부터“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과 특차 비서원 비서승(特差秘書院秘書丞) 제수”의 밀조를 받았다.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의 전 주사 임용헌(林容憲)·충남 연산(連山)의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충북 보은·청주, 경북 상주, 경남 거창·안의, 전북 무주 등지에서 항전을 이어가다가 1908년 6월 15일 보은의 관주점(冠酒店)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공주재판소로 송치되었다. 일본군의 고문과 회유 협박에도 굴하지 않자 일본군은 그의 한쪽 눈을 제거하였고, 그는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1910년 풀려나서 다시 재기를 계획하다가 1913년 3월 12일 체포되어 대구재판소에서 15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단식으로 항거하여 단식 28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노병대 판결문」, 공주지방재판소, 1908년 9월 14일. 「폭도 수괴 노병대 순사에게 체포된 건」, 1908년 8월 1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송상도,『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129-13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의병항쟁사자료집, 1983, 535-53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83, 48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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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상주군 화동면 누항마을 |
|---|---|
| 주소 | 경북 상주시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폭도 수괴 노병대 순사에게 체포된 건」과「노병대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손자 노진영(59세)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노병대 체포보고(1908년 8월 17일)
노병대 판결문(공주지방재판소, 1908년 9월 14일)
노병대 생가 터 우측
노병대 생가 터 좌측
노병대 생가 터 후면
노병대 생가 터 연못
노병대 생가 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