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권쾌복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주)국인산업이 들어 서 있다. |
| 정의 | 1941년 2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다혁당에서 당수 겸 예술부장으로 활동한 권쾌복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다혁당/백의단 |
| 관련 인물 | 문홍의/배학보/최영백/김효식/김성권/이도혁/유흥수 |
| 관련 내용 |
권쾌복(權快福, 1921~2009)은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1년 2월 동교생 문홍의(文洪義)·배학보(裴鶴甫)·최영백(崔榮百)·김효식(金孝植)·김성권(金聖權)·이도혁(李道赫)·유흥수(柳興洙) 등 15명과 함께 대구 대봉정에 있는 유흥수의 하숙집이었던 이용남(李容男) 집에 모여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되어 있던 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연구회(硏究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기존의 백의단(白依團)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확대·개편한 것이다. 또한 다혁당은 교내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다른 학교 학생은 물론 일반인까지도 포함시켰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하였으며, 당수·부당수와 그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권쾌복은 당수 겸 예술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반딧불」이 일본 경찰에 발각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여 동안 미결수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 참고 문헌 |
「권쾌복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정효준(박효준) 등 35인 예심종결결정」, 1943년 2월 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정효준(박효준) 등 6인 판결문」, 1944년 3월 23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805~828쪽.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 2002, 567~59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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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시미동 217 |
|---|---|
| 주소 | 경북 구미시 시미동 166-7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3공단3로 46-79 |
| 위치 고증 |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권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권쾌복 공적조서」 및 「신정효준(박효준) 등 35인 예심종결결정」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으며, 본인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














박효준 등 판결문(고등법원, 1944년 3월 23일)
권쾌복 생가 터 후면
권쾌복 생가 터 전경(현 국인산업) - 공장 내부 파란색 건물
권쾌복 생가 터 우측
권쾌복 생가 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