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보성학교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재 학교는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학교를 세운 성세빈의 공덕비가 남아 있다. |
| 정의 | 1922년 설립된 이래 울산 동면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보성학원이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5월 청년동맹/동면 구락부 |
| 관련 인물 | 성세빈(成世斌)/성세륭(成世隆)/장병준(張丙俊)/서진문(徐鎭文)/박학규(朴鶴奎)/김천해(金天海) |
| 관련 내용 |
1919년 3·1운동 이후 실력양성을 위한 문화운동·계몽운동 차원의 교육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울산 지역에서도 사숙·야숙·강습회 등이 세워졌다. 이때 동면 일산리 출신의 성세빈이 발기한 노동야학이 1920년 4월 일산리에 최초로 설립되었다. 설립 초 노동야학은 50여 명의 일산리의 무산 아동을 교육하였다. 2년간 지속된 야학을 기초로 하여 동면어업조합 등 일산리 인근 유지의 기부를 모아 일산리에 새로운 교사를 건축하고, 1922년 5월 1일 강습회를 신설하여 아동 100여 명과 더불어 야학 학생까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새로 설립된 강습회의 이름을 사립 보성학원으로 정하였다. 보성학원은 1945년 폐교 때까지 총 21회, 49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특히 울산 지역의 독립운동가이며 사회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원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천해·서진문·박학규·성세륭 등 울산지역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던 사회운동가들이었다. 이 때문에 보성학원은 일제에 의해 교원들의 사상이 불온하다고 학교 폐쇄명령까지 받았다. 1929년 3월 말 성세빈을 비롯한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는 조건으로 학교 폐쇄를 막을 만큼 사회운동의 요람이 되었으며, 학생들도 지역 내외에서 사회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적호소년회원이거나 울산적색비사사건(울산적색농민조합조직준비회사건, 울산독서회사건)에 개입된 10여 명의 청년 중 최도준·김두생·정진도도 보성학원 출신이었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울산군 동면 일산리 지적원도」, 1912. 성덕영, 『일산보성학교력개요』, 1996. 일성회, 『해송이 비바람에 시달려도』, 청학, 1997. 울산정책연구소, 『울산의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재조명위원회, 2008. 이현호, 「일제시대 사립 보성학교와 성세빈의 민족운동」, 『동구문화』 2, 울산동구문화원, 2006, 62~92쪽. 이현호, 「1920년대 울산 동면 지역의 사회운동」, 『지역과 역사』 20, 부경역사연구소, 2007, 261~26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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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울산군 동면 일산리 160·161 |
|---|---|
| 주소 | 울산 동구 일산동 159·160번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울산군 동면 일산리 지적원도」 해당 지번의 「토지대장」·『일산보성학교력개요』·『해송이 비바람에 시달려도』를 참조하여 위치를 비정한 이현호의 논문에 근거하여 현재 지적도와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보성학교에서 치뤄진 성세빈 장례식 사진
보성학교 학생들
보성학교 터 내 성세빈 송덕비
보성학교 터 측면
보성학교 터 근경
바다 방면으로 본 보성학교 터
바다 방면에서 본 보성학교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