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밀양공립보통학교 터 동맹휴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그 자리에 여전히 학교가 들어서 있으나 일제시기 건물은 아니다. |
| 정의 | 1922년 1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업을 전개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2 동맹휴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손정현(孫貞鉉) |
| 관련 내용 |
밀양공립보통학교는 1897년 개화인사 손정현에 의해 설립된 밀양지역 최초의 사립 개창학교(開昌學校)를 계승한 학교이다. 1919년 3월 14일 밀양군 밀양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주도하였다. 따라서 밀양공립보통학교는 밀양 민족교육의 요람이었으며 밀양 신문화의 산실이었다. 1922년 1월 12일과 13일 밀양공립보통학교에서 4·5학년과 일본인 교사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나면서 일본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1월 12일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일본인 교사 아라키[荒木]의 말을 듣지 않고 연명 퇴교한 후, 삼문리 청년운동장에 모여서 담임교사 배척 시위운동을 결의하였다. 이후 일제히 밀양군청으로 몰려가 교사를 처분하여 달라고 하자, 군 당국은 학생들에게 부주의한 점을 일러주고 공부하기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4·5학년생 전원은 도리어 동맹휴학을 결정하였다. 군 당국은 교장이 부재중이니 돌아오면 조치하겠다면서 등교를 권유했으나, 학생들은 듣지 않고 1월 13일에도 전부 동맹휴업을 하고 교사의 사죄가 없으면 등교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군 당국이 학부형을 설득함으로써 결국 사태가 어느정도 마무리될 수 있었다. |
| 참고 문헌 |
「밀양군 부내면 삼문동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2. 『밀양국민학교연혁사』. 『동아일보』, 1922년 1월 17일, 「密陽公普盟休, 교사배척으로」. 『동아일보』, 1922년 1월 20일, 「密陽普生登校, 문뎨해결은 교장이 온후에야」. 밀양초등학교백년사편찬위원회, 『밀양백년청사』, 밀양초등학교, 1998. 강만길 편,『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310∼31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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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삼문리 |
|---|---|
| 주소 | 경남 밀양시 삼문동 3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282-12 |
| 위치 고증 | 『밀양국민학교연혁사』와 이를 토대로 서술된『밀양백년청사』에 기초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밀양공립보통학교(1924)
밀양공립보통학교 터 우측
밀양공립보통학교 터 좌측
밀양공립보통학교 터 좌측
밀양공립보통학교 터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