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강창규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수풀과 잡목이 우거진 공터로 변해 있다. |
| 정의 | 1918년 10월 국권회복을 위하여 대규모 무장항일투쟁을 일으켰던 법정사 항일운동의 선봉대장 강창규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
|---|---|
| 관련 조직 | 법정사 |
| 관련 인물 | 안봉려관(安蓬廬觀), 김석윤(金錫允), 김연일(金連日), 박초월(朴初月) |
| 관련 내용 |
법정사 항일무장투쟁의 선봉대장이었던 강창규(姜昌奎, 1872~?)는 제주도 제주면 오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2년 4월 전라북도 임실군 죽림사에서 박초월(朴初月)을 은사로 출가한 후 사형사제지간인 김석윤(金錫允)과 함께 관음사(觀音寺)와 법정사(法井寺)를 무대로 활동하며 제주에 독립운동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강창규는 1918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전개된 법정사 항일무장투쟁 당시 선봉대장으로 현장의 대중들을 지휘하였다. 거사 당일인 10월 5일 그는 중문경찰관주재소 내의 기구·문서 등을 파괴하고 주재소를 방화하였다. 강창규는 거사가 끝난 후에는 4년 3개월 동안 주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 지내다가 1922년 12월 27일 제주도 우면 상효리에서 일제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는 이미 1919년 2월 4일 궐석재판으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은 상태였다. 죄명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과 방화∙체포교사∙상해교사 등이었다. 특히 일본인을 상해 교사한 죄를 중하게 물었으며, 전선과 전주를 절단한 행위 등이 포함되었다. |
| 참고 문헌 |
「강창규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연일 등 46인 판결문」, 1919년 2월 4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강창규 가출옥관계 서류」, 1928년 12월 12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정구용 판결문」, 1923년 6월 2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대한불교제주교도회, 『교도책임자명부』, 1951. 김광식,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141~176쪽. 한금순,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제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한금순, 「근대 제주불교사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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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제주도 제주면 오등리 |
|---|---|
| 주소 | 제주 제주시 오등동 84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연일 등 46인 판결문」∙「정구용 판결문」∙「강창규 가출옥관계 서류」 및 교도책임자명부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














강창규 초상화(손녀의 모습을 통해 유추한 초상화임)
강창규 생가 터 전경(2019)
강창규 생가 터 전경(2019)
강창규 관련기사『( 매일신보』, 1923. 2. 20)
강창규 생가 터 입구 전경(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