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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제주의병 집결지 - 광청리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거리
상태 멸실 / 밭으로 변해 있다.
정의 1909년 3월 제주의병들이 집결하였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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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관련 조직  
관련 인물 고사훈(高仕訓)/김만석(金萬石)/조인관(趙仁官)
관련 내용 1909년 2월 25일 의병장 추대와 함께 기병을 결의한 의병의 중심세력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대의명분을 밝히고, 왜적의 무리가 우리의 강토를 짓밟고 있는 지금, 각 지역에서 국권수호를 위하여 일어났으니 우리 제주도민도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구체적인 행동 내용을 담은「통고사(通告事)」를 작성하여 동쪽의 화북으로부터 서쪽 용담에 이르기까지 알렸다. 의병의 모병은 10,000인을 목표로 삼았고, 불참 이장의 사형, 선박의 출입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고사훈(高仕訓)과 김만석(金萬石)·조인관(趙仁官) 등은 곧바로 대정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전남경비발 제378호」(1909년 3월 6일)에는“3월 1일 오전, 대정순사주재소의 보고에 의하면 어제 오후 3시 돌연 동군 우면 신평리로부터 민란이 일어나 폭도 4,50명이 대정성내에 내습한다는 풍설을 듣고 수색한 바 고사훈, 이중심 양인이 스스로 의병장이라 칭하고 민병 만 명을 인솔하여 제주성에 들어가서 조선의 옛 법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여 각리 이장을 협박 구타하고 출병을 촉구하여 60여 명을 얻었고, 동군 중면 광청리에 집결하여 세력이 실히 창궐하다고 함.”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고사훈과 조인관·김만석 등은 영락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과 신평, 안성, 광청 등지에서 장정 300여 명을 의병에 가담시켰다. 그러나 당시 대정군수였던 김종하가 관군과 장정을 동원, 경찰과 협력하여 의병 탄압에 나섰다. 결국 3월 1일 의병장 고사훈과 김만석이 체포되고 나머지 의병대는 지휘부를 잃고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 문헌 「全南警秘發제378호」,『暴徒에 관한 篇冊』, 경무국, 1909.
김동전,「1909년 제주의병의 실상과 의의」,『성주』5, 고씨종문회총본부, 1995.
제주도지편찬위원회,『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대정군 중면 광청리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서리 1635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暴徒에 관한 篇冊』중「全南警秘發제378호」에 따르면, ‘고승천, 이중심 양인이 스스로 의병장이라 칭하고 민병 만명을 인솔하여 제주성에 들어가서 조선의 옛법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여 (중략) 동군 중면 광청리에 집결하여 세력이 실히 창궐하다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주민 조인후(70세)의 증언에 따르면, 1900년대 광청리의 면사무소와 숙소(객사터) 등이 광해악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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