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고사훈·김만석 순국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거리 |
| 상태 | 멸실 / 현재 도로에 편입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 정의 | 1909년 3월 4일 제주에서 항일의병운동을 일으켰던 의병장 고사훈과 의병 김만석이 순국한 장소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9 제주의병전쟁 |
|---|---|
| 관련 조직 | 제주의병 |
| 관련 인물 | 고사훈(高仕訓), 김만석(金萬石), 김재돌(金在乭), 양남석(梁南錫), 조인관, 김석윤(金錫允), 양만평(梁萬平), 이중심(李中心), 한영근(韓永根) |
| 관련 내용 |
1909년 2월 25일(음력 2월 6일) 고사훈(高仕訓)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인관(趙仁官)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하였다. 창의 당일 고사훈·김만석(金萬石)·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조인관 등은 대정군으로 가서 모병을 시작하고, 김석윤(金錫允)·양만평(梁萬平)·이중심(李中心)·한영근(韓永根) 등은 의병을 모았다가 고사훈이 거사하는 것을 기다려 가담할 것을 계획하였다. 1909년 2월 25일(음력 2월 6일) 고사훈(高仕訓)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인관(趙仁官)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하였다. 창의 당일 고사훈·김만석(金萬石)·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조인관 등은 대정군으로 가서 모병을 시작하고, 김석윤(金錫允)·양만평(梁萬平)·이중심(李中心)·한영근(韓永根) 등은 의병을 모았다가 고사훈이 거사하는 것을 기다려 가담할 것을 계획하였다. 고사훈은 영락리에서 100여 명, 신평리에서 100여 명을 규합하고, 또 대정성의 북문 밖에 위치하고 있던 마을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의병부대는 대정주재소의 예측과 달리 대정성을 습격하지 않고 2월 28일 대정군의 중면 광청리에 집결하였다. 제주경찰서 대정주재소는 3월 1일에 광청리 민가를 습격하여 고사훈과 김만석을 체포하였다. 3월 2일 대정에 도착한 순사부장 구보희등차(久保喜藤次)는 고사훈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4일 오전 고사훈과 김만석은 서귀포주재소로 출발하려 할 때 포승줄을 끊고 감시하는 간수와 순사를 쓰러뜨리고 달아나다가 대정성 동문 밖 400~500m 지점에서 순사에 의하여 사살되어 순국하였다. |
| 참고 문헌 |
「김만석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濟警秘發제36호의 5」,『暴徒에 관한 篇冊』, 경무국, 1909. 김동전,「1909년 제주의병의 실상과 의의」,『성주』5, 고씨종문회총본부, 1995. 제주도지편찬위원회,『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광복회 제주지부,『모충사의 항일독립운동 선열록』, 199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책 1, 1974. 김찬흡, 『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 2006. 제주항일기념관, 『제주항일항쟁사 : 기유제주의병항쟁편』,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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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대정군 우면 안성리 |
|---|---|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213-2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暴徒에 관한 篇冊』중「濟警秘發제36호의 5」에 따르면, ‘유치중인 적괴수 고승천, 적도 김만석 2명이 포승을 끊고 돌연 간수하는 순사를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도주하였으므로 각원은 빨리 추적하여 대정 동문 밖 수정(數町)에 이르러도 적의 도주가 빨라서 체포할 가망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위 두사람을 사살하고 시체는 그곳 원야(原野)에 가매장하였음’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 위치는 전 제주보훈청장 이대수, 마을이장 김경수의 안내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














고사훈 김만석 순국지 전경(2019)
고사훈 김만석 순국지 전경(2019)
고사훈 김만석 순국지 전경(2019)
고사훈 김만석 순국지 전경(2019)
고사훈 김만석 순국지 전경(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