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신팔균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원형보존 / 당초 1850년경 전통 한옥 형태로 건립한 것이나, 현재는 ㄱ자형으로 평면을 갖춘 안채와 부속건물인 광채가 남아 있다. |
| 정의 | 서로군정서와 대한통의부 등에서 활약한 신팔균이 1910년 만주 망명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보명학교/대동청년단/서로군정서/신흥무관학교/대한통의부 |
| 관련 인물 | 신가균(申可均)/신필균(申弼均)/신헌(申櫶)/임수명(任壽命) |
| 관련 내용 |
신팔균(1882~1924)은 신헌(申櫶)의 손자이며, 신석희(申奭熙, ?~?)의 아들이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강계진위대(江界鎭衛隊)의 정위로 근무하던 그는 1909년 고향인 이월면 노원리로 내려왔다. 낙향 후 그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교육 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신욱(申㮋)은 1897년 노곡에 세운 보명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민족정신 고취와 함께 한문, 국어,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고향집인 신헌고택(충청북도 문화재자료)에 거주하였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1909년 보성중학교 교장 박종화(朴重華)를 중심으로 남형우(南亨祐)의 집에서 조직한 비밀결사로서 회원이 120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대동청년단 동지들과 연계를 통해 체득한 구국 사상과 방략을 보명학교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에 전파하고자 하였다. 국권이 강탈당하자 보명학교를 동생인 신가균에게 맡기고 구주하던 신헌고택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의 망명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승희(李承熙)의 기록을 참고하면 1914년 이전에 망명했음은 분명하다. 그는 무장투쟁에 앞장서던 중 일본의 압력을 받은 중국군의 공격을 받고 1924년 7월 2일 전사하였다. 신팔균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임수명은 갓 난 딸과 함께 자진하였다.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1963)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신팔균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4년 7월 30일, 「신팔균 생존?, 확실치는 못하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10일, 「신팔균 전사 후보(後報), 야외 연습 중 토군 습격으로 교전 중 탄환이 다하여 전사」. 『신한민보』, 1924년 9월 18일, 「신팔균씨 전사 후보(後報), 야외 연습 중 토군의 습격으로 탄환이 진하여 전사함」. 국사편찬위원회, 『대한제국관원이력서』, 1972, 360·607쪽. 진천군지편찬위원회, 『진천군지』, 진천군, 1997, 1332·1462~1463쪽. 광복회 충청북도지부, 『충청북도 독립유공자공훈록』, 2001, 235쪽. 진천상산고적회, 『우리고장 마을사』, 2007, 146~154쪽. 상산고적회, 「동천 신팔균 장군」, 『상산문화』 12, 2006, 189쪽. 박걸순,『충북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국학자료원, 2012, 316~347쪽. 박걸순, 「申八均의 생애와 민족운동」,『역사와 담론』 57, 2010, 158~16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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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 |
|---|---|
|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논실안길 58-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신팔균은 고향에서 보명학교를 운영하였는데 당시 이곳 신헌 고택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 곳에 사는 문중 후손 신응현(이월면 노원리, 2008년 조사당시 78세)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














대한제국 장교시절 동료들과 함께(앞줄 왼쪽이 신팔균)
신팔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