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설진영 서실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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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건물 |
| 상태 | 변형 /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현재는 시멘트 기와로 초가였던 지붕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 정의 |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순절한 설진영이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사상을 배양하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40 창씨개명 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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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의 자는 도홍(道弘)이며 호는 남파(南坡), 본명은 진창(鎭昌)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고 여러 면에서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 들어가 경전은 물론이요 제자백가서를 탐구하여 당대 학자로 성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스승인 기우만과 함께 장성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6년 기우만이 체포되고, 1910년 국치를 당하자 오랑캐는 상대할 수 없다고 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아미산(娥眉山) 남쪽에 서실을 세우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고전을 탐독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하며 민족의식을 교육하였다. 1939년 11월 일제는 이른바 한국인의 ‘황민화(皇民化)’를 촉진하기 위해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도록 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모든 조선인은 1940년 2월부터 동년 8월 10일까지 창씨개명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설진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부끄러움을 느꼈다. 고민하던 설진영은 1940년 5월 19일 마을 건너편에 자리한 설씨 제실 앞의 논 가운데 있는 우물로 찾아가 몸을 던졌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인 창씨개명에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 적지 않지만,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순절한 경우는 설진영이 거의 유일하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서실은 1910년 설진영이 개인 서재 겸 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것이다. 앞면 4칸, 옆면 3칸으로 앞면과 뒷면 모두 툇마루가 있는 형태다.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현재는 시멘트 기와로 바뀌었다. |
| 참고 문헌 |
순창문화원,『순창의 문화재』, 순창문화원, 2002, 101쪽. 「설진창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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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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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전북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2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순창의 문화재』에 설진영 서실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실 바로 옆에 살고 있는 설진영의 8촌 동생 설진원(83)의 증언을 통해 서실이 위치한 곳이 원래 설진영의 생가 마당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설진영 서실 후면
설진영 서실 서측면
설진영 서실 대문
설진영 서실 건물
설진영 서실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