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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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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국내독립운동
종류 건물
상태 원형보존 / 1883년 용성(龍城)이 중건한 이후 현재까지 대웅전·자방루·명부전·팔상전·나한전 등 주요 전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정의 변상태·이주현 등 경남지역 애국지사들이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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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관련 조직 혁신단/의열단/대한독립단/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인물 신화수(申華秀)/한봉진(韓奉眞)/변상태(卞相泰)/이주현(李周賢)/김상옥(金相玉)/윤영백(尹永伯)
관련 내용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 중턱에 자리잡은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성의 유서 깊은 사찰로, 일제시기에는 경남지역 애국지사들의 주요한 활동거점이기도 하였다. 특히 승려 신화수(申華秀)와 한봉진(韓奉眞)은 3·1운동 전후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 변상태(卞相泰)·이주현(李周賢) 등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면서 이들이 거사를 논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본인들도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1년 전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도모하다가 체포된 옥천사 승려 신화수는 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23년에는 의열단원으로 폭탄과 권총 등의 무기를 휴대한 채 상하이[上海]로부터 귀국한 김상옥에게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해 준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한봉진은 1919년 무렵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군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윤영백(尹永伯)과 함께 국내에서의 연락책임을 임무를 맡고 옥천사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였다.

676년 의상(義湘)에 의해 창건된 옥천사는 1208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9년 학명(學明)과 의오(義悟)가 삼창하였다. 1883년(고종 20) 용성(龍城)이 중건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참고 문헌 『광여도(廣輿圖)』.
「한봉진 판결문」, 1921년 3월 31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팔결문.
「한봉진 판결문」, 1921년 5월 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전우진 판결문」, 1923년 7월 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한 등 5인 판결문」, 1923년 10월 1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1년 5월 14일, 「第二次獨立運動을 계획하든 김두현 외 십이명, 경남경찰부에 전부 잡히어」.
『동아일보』, 1923년 5월 27일, 「求刑보다 二年을 加重하야, 金翰에게 七年言渡, 申華秀 한사람만은 무죄, 金相玉事件 關係者의 判決」.
「조선독립운동자의 검거」, 1921년 5월 12일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3)』,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고성군지편찬위원회, 『고성군지』, 1995, 344~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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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주소 경남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위치 고증 「한봉진 판결문」·「전우진 판결문」 과 『동아일보』 1921년 5월 14일자, 1923년 5월 27일자 및 「조선독립운동자의 검거」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전반에 간행된 『광여도(廣輿圖)』에 옥천사가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연화산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옥천사 사적기를 통해 옥천사는 창건된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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