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대구사범학교 학생비밀결사 운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변형 / 본관 건물과 강당만 남아 있고, 다른 건물들은 새로 지었다. 본관에 역사관이 있다. |
| 정의 | 비밀결사인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문예부·연구회·다혁당 등이 결성되어 활동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백의단/문예부/연구회/다혁당(茶革黨) |
| 관련 인물 | 박효준(朴孝濬)/신태휴/김광제/ |
| 관련 내용 |
대구사범학교의 모태는 1906년 경북관찰사 신태휴(申泰烋)와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가 교원 양성을 위해 설립한 사립대구사범학교였다. 이후 1923년 4월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로 전환되었다가 1929년 6월 관립으로 전환되어 개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는 대구지역 학생항일운동의 선봉이었다. 1932년에는 ‘교유 및 생도의 비밀결사 사건(대구사범 R·S사건)’으로 37명이 구속되었다. 이후 1939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강제로 동원된 경부선 철도공사(왜관사건)에서 민족차별을 받게되자 비밀결사 백의단(白衣團)을 결성하였다. 한편 평소 독서모임을 가졌던 박효준(朴孝濬) 등은 1940년 1월 비밀 잡지 『반딧불』을 제작하였다. 백의단과 독서모임을 가졌던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1940년 11월 문예부를 결성하였으며, 다음해 1월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또 문예부와 연구회 참여 학생들이 졸업함에 따라 1941년 2월 두 조직을 확대·개편한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였다. 문예부·연구회·다혁당은 모두 나라의 독립을 목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41년 7월 문예부의 비밀 잡지 『반딧불』이 드러나면서 300여 명이 검거되고, 그 가운데 3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
| 참고 문헌 |
「신정효준(박효준) 등 35인 예심종결결정」, 1943년 2월 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정효준(박효준) 등 6인 판결문」, 1944년 3월 23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선총복부관보』, 1937년 1월 9일, 「광고-생도모집(대구사범학교)」.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대구지적도」, 1927(대구향토역사관 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799~80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1977, 763~780쪽. 대구사범학생,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 1993, 23~24쪽.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증업자료집』 1, 2002, 566~596쪽. 사)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 신택리지』, 북랜드, 2007, 528쪽. 허종, 「일제강점기 후반 대구사범학교의 학생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2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186~209쪽. 향토역사관, 『옛 사진으로 본 근대 대구』, 향토역사관, 2008, 92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대봉정 60 |
|---|---|
| 주소 | 대구 중구 대봉1동 60-18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178 |
| 위치 고증 | 「박효준 등 판결문」과 『독립운동사』 9권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관보』 1937년 1월 9일자에 대구사범학교의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대구사범학교의 본관 건물이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에 남아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














대구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 학생비밀결사 운동지 기념비
대구사범학교 강당
대구사범학교 강당과 우측면
대구사범학교 전경
대구사범학교 본관 정면
대구사범학교 본관 후면
대구사범학교(「1:10,000(昭和12年修正測圖)」, 1937,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관련기사(『동아일보』, 1932년 4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