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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신홍식 생가 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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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신홍식이 살았던 집은 없어졌다.
정의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신홍식이 태어난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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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관련 인물 이승훈(李昇薰)/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신석구(申錫九)/손병희(孫秉熙)
관련 내용 신홍식(申洪植, 1872~1937)은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공주에서 감리교 목사로 시무하였다.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그는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동지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승훈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 등과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협의하고, 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신석구(申錫九) 등과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 재동에 있는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광복회 충청북도지부, 『충청북도 독립유공자공훈록』, 2001,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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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
주소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155-4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충청북도 독립유공자공훈록』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춘식씨(인차리 148-3번지 거주, 77세)이 155-4번지 컨테이너 집을 신홍식이 살았던 위치라고 증언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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