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나용균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나용균 생가는 생가와 사당이 복원되는 등 정비가 이루어져 있다. 바로 앞에 주차장과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다. |
| 정의 | 2·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한 나용균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2·8독립선언, 3·1운동, 극동인민대표대회, 국민대표대회 |
|---|---|
| 관련 조직 | 조선유학생학우회/국민대표회주비회/대한민국 임시정부 |
| 관련 인물 | 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 |
| 관련 내용 |
나용균(羅容均, 1895~1984)은 1895년 11월 25일 전북 정읍군 영원면 운학리에서 부친 나도진(羅燾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7년 10월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하고 있던 중 1919년 2월 8일 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 등과 함께 도쿄 YMCA에서 열린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나용균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리자, 전라도 대표로 의원에 선임되었으며, 법제위원과 정무조사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민족주의 진영의 인사였으면서도 나용균은 1921년 11월에는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1922년 5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적 해체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국민대표회주비회에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곳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신한민보』, 1919년 11월 4일, 「임시의정원회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512·67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 1972, 201·222·520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7, 1973, 113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 9, 1975, 155~156·626·91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3, 1977, 49쪽. 문화재청,『정읍 나용균 생가 및 기록화 조사보고서』, 2010. 김주용, 「독립운동가 나용균의 생애와 민족운동」,『동국사학』78, 2023, 275~31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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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고부군 북부면 운학리 164-1 |
|---|---|
| 주소 | 전북 정읍시 영원면 운학2길 14-6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3권과 4권 및「송강선 판결문」등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가는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이에 근거하여 위치를 비정하였다. |














나용균 생가 행랑채와 대문
나용균 생가 안채 터
나용균 생가 인근의 집안 사당
나용균 생가 사랑채
나용균 생가 인근의 사당 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