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나용균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19세기 말엽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안채는 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고 사랑채 등 여타 건물은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
| 정의 | 2·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한 나용균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2·8독립선언 |
|---|---|
| 관련 조직 | 조선유학생학우회/국민대표회주비회 |
| 관련 인물 | 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 |
| 관련 내용 |
나용균(羅容均, 1895∼1984)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 중,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한국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대적인 독립시위운동을 위한 자금조달차 귀국하여, 송진우·김성수·최린 등을 방문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도쿄[東京]로 돌아와 준비를 계속한 끝에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학우회 명의의 집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문 발표에 참여하였다. 2·8독립선언 후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자신에게로 신변에 위협이 닥치자 1919년 4월 상하이[上海]로 피신하였다.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이 열리자 전라도 대표로 의원에 선임되었으며, 법제위원과 정무조사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민족주의진영의 인사였으면서도 1921년 11월에는 여운형·김규식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1922년 5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전적 해체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국민대표회주비회에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곳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나용균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송강선 판결문」, 1920년 7월 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 1919년 11월 4일, 「임시의정원회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512·67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 1972, 201·222·520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7, 1973, 113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9, 1975, 155-156·626·91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3, 1977, 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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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고부군 북부면 운학리 |
|---|---|
| 주소 | 전북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164-1 |
|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운학2길 14-6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3권과 4권 및「송강선 판결문」등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가는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이에 근거하여 위치를 비정하였다. |














나용균 생가 인근의 집안 사당
나용균 생가 인근의 사당 대문
나용균 생가 안채 터
나용균 생가 사랑채
나용균 생가 행랑채와 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