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삼성면 선정리 뒷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산야 |
| 상태 | 원형보존 / 만세시위가 있던 선정리 뒷산은 큰 변화 없이 보존되어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20일과 4월 2일 삼정면 선정리 주민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20 삼성면 독립만세시위/1919.4.2 삼성면 선정리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유해길(柳海吉)/임백규(林百奎)/이성교(李聖敎)/이성용(李性用)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20일 삼성면 선정리 박알미에 사는 이성교·임백규·유해길 등은 마을 뒷산에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2일 밤에도 이성용의 주도로 마을 주민 수십 명이 산 위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는데, 이성용은 시위에 참가한 군중을 지휘하여 약 80명과 함께 음성군 삼성면 천평리 소재 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여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성용은 가지고 있던 곤봉으로 주재관 순사 고노 시게지로(河野重次郞)의 오른쪽 어깨를 구타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불온언동 및 폭행선동의 죄명으로 징역 1년 2월형이 확정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고문의 후유증과 일경의 탄압 및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수절사의(守節死宜)라는 유서를 남기고 마을 뒷산 버드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이성용 판결문」(1919년 5월 1일, 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이성용 판결문」(1919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 「이성용 판결문」(1919년 6월 26일, 고등법원). 「朝鮮總督府 內秘補 433;忠北機第269號: 地方狀況報告」, 1919년 4월 5일,『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4. 「高 第9833號: 獨立運動에 관한 건(제37보)」, 1919년 4월 4일,『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 「朝特報 第9號: 騷擾事件에 관한 狀況(1919.3.26-1919.4.5)」, 1919년 4월 7일,『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독립운동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971, 1085~1086쪽. 이병헌,『삼일운동비사』, 시사시보사 출판국, 1959, 88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63쪽. 박걸순, 「충북지역 3·1운동의 전개 양상과 성격」,『중원문화논총』15,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0, 16쪽. 김진호, 「충북의 3·1운동」,『역사와 담론』68, 호서사학회, 2013, 57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 |
|---|---|
|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 산13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성용 판결문」 및 『삼일운동비사』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선정리 뒷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