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삼성경찰주재소 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만세시위 당시 천평리주재소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그 자리는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
| 정의 | 1919년 4월 2일 선정리 마을 주민들이 몰려가 만세시위를 벌였던 경찰관 주재소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년 4월 2일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성용(李性用) |
| 관련 내용 |
1919년 4월 2일 밤, 이성용의 주도 아래 삼성면 선정리 마을 주민 수십 명은 마을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날 밤, 이성용은 8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지휘하여 삼성면 천평리 소재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며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주민들은 더욱 격렬하게 항의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성용은 가지고 있던 곤봉으로 주재관 순사 고노 시게지로(河野重次郞)의 오른쪽 어깨를 구타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불온언동 및 폭행선동의 죄명으로 징역 1년 2월형이 확정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고문의 후유증과 일경의 탄압 및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수절사의(守節死宜)라는 유서를 남기고 마을 뒷산 버드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 「진천」,『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1918. 「이성용 판결문」(1919년 5월 1일, 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이성용 판결문」(1919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 「이성용 판결문」(1919년 6월 26일, 고등법원). 「朝鮮總督府 內秘補 433; 忠北機第269號: 地方狀況報告」, 1919년 4월 5일,『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4. 「高 第9833號: 獨立運動에 관한 건(제37보)」, 1919년 4월 4일,『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 「朝特報 第9號: 騷擾事件에 관한 狀況(1919.3.26-1919.4.5)」, 1919년 4월 7일,『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독립운동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2, 6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1085~1086쪽. 이병헌,『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888쪽. 박걸순, 「충북지역 3·1운동의 전개 양상과 성격」,『중원문화논총』15,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0, 16쪽. 김진호, 「충북의 3·1운동」,『역사와 담론』68, 호서사학회, 2013, 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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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천평리 |
|---|---|
|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천평리 356(대성로 30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성용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이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마을 주민 이용근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삼성경찰주재소 터 전경
우측면에서 본 삼성경찰주재소 터
좌측에서 본 삼성경찰주재소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