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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영동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건물
상태 변형 / 영동시장은 현재 위치와 같으나 2021년 조사에서는 아케이드가 설치돼 있는 등 외형이 크게 변모하였다. 만세시위 당시 나무다리였던 영동교는 콘크리트 다리로 변했고 이름도 ‘영동제1교’로 바뀌었다.
정의 1919년 3월 25일과 4월 4일 영동군 영동면 주민 2천여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3.25 영동군 영동장터 독립만세시위/1919.4.4 영동군 영동장터 독립만세시위
관련 조직  
관련 인물 박성하(朴聖夏), 한의교(韓義敎), 정성백(鄭聖白), 장인덕(張仁德), 김태규(金泰圭), 정우문(鄭友文), 한광교(韓光敎)
관련 내용 1919년 4월 4일 오후 2시경에 장터에서 약 2,000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는 박성하(1895~1974)와 한의교, 정성백, 장인덕, 김태규, 정우문, 한광교 등이 주도하였다. 거사 장소와 날짜를 영동의 장날로 결정한 이들은 이날 면내 아랫장터에서 회동하였다. 이들은 주모 박명월(朴明月)이 마련한 주안으로 술잔을 나누며 최후의 맹세를 한 뒤 가두로 진출하였다 앞선 3월 25일 영동 장날을 맞아 시장 남쪽에 있는 영동다리의 가장자리 사방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쓰여진 커다란 태극기가 걸렸고, 주변 다른 여러 곳에는 종이로 만든 태극기 약 150장이 나돌았었다.
시위가 격화하자 일제 경찰과 수비대가 출동,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군중의 기세가 누르러들자 않자 무차별 발포를 감행, 6명은 순국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시위를 주도한 김태규·장인득·한광교 등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각각 징역 1년형과 10월형,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박성하(1991), 김태규(1992), 건국포장을 장인득(1995), 대통령표창을 한광교(1995)에게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朝鮮總督府 內秘補 460; 忠北機第276號: 地方狀況報告」, 1919년 4월 8일,『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4.
「密 第102號 其157; 朝特 第85號; 第1號; [電報 : 4월 4일의 시위 상황 1]」, 1919년 4월 5일,『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1.
「密 第102號 其156; 朝特 第87號; 第35號; [電報 : 4월 4일의 시위 상황 3]」, 1919년 4월 6일,『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1.
「密 第102號 其159; 第12號; [電報 : 전국 각지의 시위 상황]」, 1919년 4월 6일,『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1.
「騷擾事件의 後報, 충청북도 永同, 일본인이 야경」, 『매일신보』, 1919년 4월 9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91~92쪽.
金正明, 『朝鮮獨立運動』 Ⅰ, 原書房, 1967, 516·569·743쪽.
박걸순,『충북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국학자료원, 2012, 32쪽.
박걸순, 「일제강점기 충북 영동지역의 민족운동」,『동학학보』48, 2018, 191~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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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면 계산리
주소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영산로1길 10(계산리 626-1)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독립운동사』 3권 및 『조선독립운동』 1권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지조사에서 영동교는 현재 제1 영동교 위치이며 영동시장은 현재 재래시장 위치와 동일한 자리임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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