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군산경찰서 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옛 건물은 사라지고 공영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5일 전개된 옥구군의 독립만세시위지이자 항일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구금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영명학교 |
| 관련 인물 | 김윤실(金潤實)/이두열(李斗悅)/박연세(朴淵世)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5일 군중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 등 1,000여 명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3·1운동을 계획했던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박연세 등이 3월 5일 새벽 일경에 잡혀가자 교사 김윤실은 영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당일 8시경 학교 교정에 모였다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군산 시내로 행진하였다. 중도에서 보통학교 학생과 많은 교인들이 행렬에 참여하여 시위대열은 500명으로 증가하였고, 평화동·영동을 거쳐 본정 큰 거리를 지나 경찰서에 이르렀을 때에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군산경찰서 앞에서 구속된 영명학교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경들은 이를 막기 위해 재향군인까지 출동시키고도 부족하여 이리(현 익산)주재 헌병대까지 요청하여 만세시위대를 탄압하였다. 당시 검거된 사람은 90여 명에 이른다. 또한 이곳은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를 체포·구금한 탄압장소이다. 군산경찰서는 1910년에 신축되었고 1922년 9월에 증축되었다. |
| 참고 문헌 |
『군산일보』, 1933년 1월 1일, 「군산부구획확장지도」. 「이두열 등 37인 판결문」, 1919년 4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523∼525쪽. 이병헌,『삼일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902∼903쪽. 김양규, 『우리 고장의 항일운동사-옥구농민의 항일항쟁사』, 군산문화원, 2001, 12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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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군산부 명치정 2정목 |
|---|---|
| 주소 | 전북 군산시 중앙로1가 17-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3권과 「이두열 등 37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군산부구획확장지도」를 참고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1930년 무렵의 명치정
옛 군산경찰서 모습
옛 군산경찰서 건물
옛 군산경찰서 터 우측
옛 군산경찰서 터 전경
옛 군산경찰서 터 좌측
위에서 바라본 옛 군산경찰서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