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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상서면 3·1운동 진원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산야
상태 변형 / 현재는 작은 마을이다. 6·25전쟁으로 인해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의 1919년 3월 28일 화천군 상서면 봉오리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시작한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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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1919.3.28 화천군 상서면 봉오리 독립만세시위
관련 조직  
관련 인물 이준극/박용구/김광필/이창선
관련 내용 1919년 3월 28일 상서면 주민들이 과격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27일 상서면 봉오리 이준극(李俊極)의 집에서 뽕나무 묘목관계로 열린 회의에서 박용구(朴容九)와 철원간이농업학교 졸업생 김광필(金光弼)이 구장 이창선(李昌善)과 합의하여 시위를 적극 선전하고, 부근 마을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인근 파포리·다목리 등에 연락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주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만들고 여러 마을에 통문을 돌렸다. 3월 28일 새벽 봉오리 주민들이 뒷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러 인근 마을 주민들을 선도하면서 상서면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각 마을에서 삼베주머니에 점심을 싸서 망태에 걸머 메고 몽둥이를 든 군중들이 파포리의 창두루 상서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1,000명여 명의 군중은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면장 정종하(정종하)와 면서기를 끌어냈다. 군중들은 시위에 호응하지 않는 면장을 끌고 화천읍으로 향했다. 산양리 헌병주재소에서 헌병들이 출동하여 저지하였으나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여 물리쳤다. 구운리·신풍리 등에서도 주민들이 합세하였다. 상서면사무소에 회의 때문에 모였던 구장들은 시위 상황을 보고 자신의 마을에 서신을 보내 주민들을 설득, 시우에 참여케 하였다.

상서면장과 면서기 등을 끌고 화천으로 향하던 2,000여 명의 군중들은 신풍리 앞 주막거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때 화천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출동하고 춘천으로부터 장교이하 10명의 지원군이 도착하였다. 헌병 및 보병들은 군중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현장에서 4명이 즉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였다. 군중들은 해산하였으나 이후 검거가 시작되어 많은 사람이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22명이 징역형을 받고, 태형을 받은 인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0보)」, 1919년 3월 29일;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3, 1979, 138쪽.
「소요사건에 관한 상황(3월26일~4월5일)」, 1919년 4월 7일;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독편 3, 1979, 173쪽.
「이창선 등 22인 판결문」, 1919년 7월 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2, 1971, 551~556쪽.
광복회 강원도지부, 『강원도항일독립운동사』Ⅲ, 1992, 338~340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봉오리
주소 강원 화천군 상서면 봉오2리 산 56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독립운동사』2권 및「이창선 등 22인 판결문」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상서면 만세시위의 진원지가 봉오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현재의 봉오2리에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음을 이병렬씨(이응선 손자)를 통해 고증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해 정확한 운동계획 장소와 횃불을 올린 장소는 추정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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