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합천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멸실 / 현재 옛날 장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음식점과 골목 등으로 바뀌었다. |
| 정의 | 1919년 3월 19일과 20일에 함천군 대양면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영기(金永琪)/배상기(裵祥祺)/심맹권(沈孟權)/김호수(金浩洙)/손득룡(孫得龍)/추용만(秋鏞滿)/강시만(姜時晩)/이용선(李龍善)/심재기(沈載祺)/강홍렬(姜弘烈)/주경천(朱擎天) |
| 관련 내용 |
서울과 인근에서의 3·1운동 소식을 접한 김영기·배상기·심맹권·이용선·손득룡·추용만·강홍렬·심재기·강시만·김호수·주경천 등은 대양면 대암리 수암정에 모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합천면 장날인 1919년 3월 19일 태극기를 들고 합천읍으로 들어가 오후 4시경에 장터에 모인 5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시위로 심맹권 등 17명이 체포되었다. 이튿날인 3월 20일에는 대양면 면민들이 대양면 마정마을에 모여 전날 일제 경찰에 검거된 17명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6㎞ 거리인 합천읍내로 행진하면서 일어났다. 오후 7시경에 김영기 등 주민 500여 명은 합천경찰서로 가서 구금된 심맹권 등 17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합천경찰서를 습격하고, 일제 경찰을 구타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총격을 가해 4명이 순국하고 11명이 부상을 당했다. |
| 참고 문헌 |
「이용선 등 3인 판결문」, 1919년 6월 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심맹권 판결문」, 1919년 7월 1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24~25쪽. 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31~233쪽. 합천군사편찬위원회, 『합천군사』, 1996, 200~202쪽. 『경남일보』, 2009년 3월 19일, 「조찬용의‘경남의 3·1운동’(3)-합천(대병,초계,대양)과 함안(군북) 3.1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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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면 |
|---|---|
| 주소 |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68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고등경찰관계적록』과 「심맹권 판결문」·「이용선 등 3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옛 합천장터의 위치는 합천문화원의 자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














합천장터 근경
합천장터 원경
합천장터 앞 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