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장흥 유치지구 전투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가수호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후방지원작전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토벌지구는 보림사 인근 지역의 골짜기로 전투 당시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인근 공수평 일대는 탐진강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
| 정의 | 1951년 7월 29일 전남 경찰국 기동대를 비롯, 광주, 나주, 화순, 보성, 영암, 장흥, 해남 등 경찰서 연합부대 1,500여 명이 유치면 덕룡산 일대 빨치산을 포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호남지구전투, 유치지구 전투 |
|---|---|
| 관련 조직 | 전남경찰, 유치지구 빨치산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처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들이 입산하여 계속 저항함으로써 태백산, 지리산 등 지역은 빨치산의 거점이 되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정부는 전투임무만을 수행하는 태백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와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 등을 설치했다. 전투경찰사령부는 군부대와 합동으로 혹은 지방 경찰과 함께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용문리 일대의 빨치산들은 민청연대 제17연대와 각 군당 소속 약 500명이‘용문리’와 보림사 골짜기 마을을 근거지로 관공서 습격, 인근 주민의 살인과 약탈 등으로 치안을 교란하였다. 이에 따라 전남 경찰국 기동대를 비롯, 광주·나주·화순·보성·영암·장흥·해남 등 경찰서 연합부대 1,500여 명이 덕룡산, 운월리 등을 포위하고 경찰부대는 퇴로를 차단하면서 정면과 측면을 공격하여 96명을 사살했으며 18명을 생포했다. 이미 1951년 4월 20일에도 장흥경찰서에서 민청연대를 공격하여 100여 명을 살상시켰다. 보림사 골짜기는 유치지구 빨치산의 근거지였고, 경찰과 빨치산의 전투가 벌어졌던 공수평, 용문리, 운월리, 조양리, 화순군 도암면 우치리, 우산리 등지의 중간 지점이기도 하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 보조국사가 창건한 이래, 그동안 여러 차례 병란을 맞아 소실과 중건을 거듭했는데, 6·25전쟁 중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사천왕각을 제외하고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 |
| 참고 문헌 |
한국경찰사편찬위원회,『 한국경찰사』2, 내무부 치안국, 1973, 329·370쪽. 문연열,『 물에 잠기고 세월에 잠긴 유치사람들』, 답게, 2009, 310·363-37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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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
|---|---|
| 주소 |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보림사 일대 |
| 도로명 주소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로 224 (보림사) 일대 |
| 위치 고증 | 『한국경찰사』2권에 의하면, 인천상륙작전 이후 10월 초 장흥이 수복되었으나 유치지구는 이 지역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어, 군경의 토벌작전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














1950년 10월 15일 장흥 유치지구 전투 희생자의 합동장례식(장흥문화원,『 사진으로 보는 장흥 100년사』, 1996, 51쪽)
1951년 1월 유치지서 탈환작전 중 희생된 학도의용군 기념비
국사봉 일대 고지
장흥지역의 빨치산 근거지였던 덕룡산 보림사 경내
유치리에서 운월리로 이어지는 도로
보림사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