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노량진 전투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가수호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초기작전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노량진 전투지는 사육신공원 내에 한강 조망명소로 조성되어 있을 뿐, 당시 전투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
| 정의 | 국군 혼성 제7사단이 한강인도교와 철교를 잇는 노량진 일대에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지연시켰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노량진역 39고지전투 |
|---|---|
| 관련 조직 | 미 제1해병연대, 육군 혼성 제7사단, 시흥지구전투사령부 |
| 관련 인물 | 유재흥, 김홍일 |
| 관련 내용 |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은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교량을 폭파하였지만 상행철교는 파괴되지 못하였다.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장군은 북한군이 폭파되지 못한 철교를 이용해 한강을 집중도하할 것으로 판단하고 그 남안인 노량진 - 동작동 방어선에 병력과 화력을 증깅 배치하고, 혼성 제7사단에 방어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북한군은 여의도를 주 도하선으로 정하고 있었다. 혼성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제1공병단과 공병학교 병력을 주축으로 한 혼성 1개 대대를 사육신묘가 있는 39고지와 현 수산시장 남쪽 월파정(月坡亭)에 배치하여 북한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이들 병력은 북한군이 한강을 도하하려 하자 사격을 집중하여 도하를 저지하였다. 29일 오후 북한군의 수도고지(노량진 수원지) 침투로 시작된 노량진 방면 도하에 7사단 예하 방어부대는 백병선을 펼치는 등 치열한 방어전투를 펼쳤다. 7월 1일 39고지(사육신묘)와 월파정에서도 공방전이 펼쳐져다. 여의도 도하에 실패한 북한군도 7월 3일 새벽 4시 경인 상행철교를 수리하고, 전차를 실은 기관차를 통해 한강을 건넜다. 국군은 더이상 방어선을 지킬 수 없었고, 오전 11시 철수명령을 받아 시흥-안양-수원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탈환을 위해 미 제1해병연대는 1950년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 동안 격전을 치르고 영등포를 장악한 후 23일 끊어진 한강인도교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다시 탈환하였다. |
| 참고 문헌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초기전투-서부전선편』, 1985, 318-324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2006, 171-17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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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본동 |
|---|---|
| 주소 | 서울 동작구 본동 31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6·25전쟁사』3권 등의 전투사 연구에 의하면, 혼성 제7사단 병력은 수산시장 지역인 월파정으로부터 사육신묘가 있는 39고지, 수원지 일대의 수도고지 등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지연시켰다. 이 가운데 핵심 전투지로 한강인도교와 철교를 조망할 수 있는 노량진 39고지를 특정했다. |














노량진 전투지의 주요 방어지점이었던 월파정
여의도 샛강과 월파정 터
수도고지에서 바라본 한강철교
사육신묘에서 바라본 수도고지와 한강인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