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정환직·정용기 집터 - 충효재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집은 멸실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한 충효재가 자리 잡고 있다. |
| 정의 | 1906~1908년까지 산남의진의 대장으로 활약한 정환직·정용기 부자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정환직(鄭煥直)/정용기(鄭鏞基) |
| 관련 내용 |
정환직(鄭煥直, 1843~1907)과 정용기(鄭鏞基, 1862~1907) 부자는 산남의진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북 영천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이다. 을사늑약으로 의병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나자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은 시종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아버지 뜻에 따라 정용기는 1906년 3월 산남의진을 결성하고 창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1906년 7월 신돌석부대를 후원하기 위해 북상하던 그는 경주 우각(牛角)에서 체포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산남의진도 해산하고 말았다. 감옥에서 풀려난 정용기는 1907년 4월 다시 산남의진을 일으켜, 청하·청송·영천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907년 9월 1일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환직은 아들의 뒤를 이어 산남의진을 이끌었다. 그는 흥해·영천·청송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11월 6일 청하면 각전(角田)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1907년 11월 16일 대구감옥에서 풀려나 영천으로 돌아오던 중 총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70, 578쪽. 배용일,「산남의진고」,『한국민족운동사연구』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1, 136쪽. 崔民之·金民珠,『일제하민족언론사론』, 日月書閣, 1978, 62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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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검단동 |
|---|---|
| 주소 | 경북 영천시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별빛로 1538-5 |
| 위치 고증 | 「산남의진고」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정용기의 아들 정대영과 향토사학자 조인호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충효재 후면
충효재 우측
충효재 좌측
충효재 전경
정환직 순국지 및 산남의진비
충효재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