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문수산 전투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가수호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초기작전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문수산 전투지는 전쟁 당시의 원형이 완전히 변형되었다. |
| 정의 | 1950년 6월 26일부터 27일에 걸쳐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북한군 제6사단의 도하 공격을 방어하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50 북한군 조강리 도하 |
|---|---|
| 관련 조직 | 북한군 제6사단, 김포지구전투사령부 |
| 관련 인물 | 계인주 대령, 방호산 소장 |
| 관련 내용 |
1950년 6월 25일 육군본부는 김포반도에서 남침하는 북한군의 징후와 도하 기도를 포착하여 그에 대한 대책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차 북한군 김포반도로 상륙하여 김포가도를 따라 영등포로 진출한다면 국군의 한강방어선 후방이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육군본부는 남산학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지구에 있는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여 적의 도하를 막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갑연대 일부를 증원하고, 보병학교 학생연대 후보생(갑종간부)으로 1개 대대를 급편하여 김포반도에 투입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계인주 사령관은 편성이 끝나는 대로 전날 개화산에서 밤을 세운 남산 공병학교의 혼성병력 50여 명을 우선 조강리로 이동시켜 도하장소의 경계에 임하게 하는 한편, 문수산을 중심으로 12연대 혼성대대를 북쪽 한강변에, 기갑연대 혼성대대를 서쪽 염하변에 배치하였다. 26일 오후부터 북한군의 도하가 시작되었다. 북한군 제 6사단은 26일 오후 문수산 동북쪽의 조강리로 27일 아침에는 문수산 북쪽의 강녕포로 도하를 시도하였다. 또한 강화도 갑곶에서도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문수산 서남쪽으로 도하하였다. 문수산 북쪽의 국군 12연대와 서쪽의 기갑연대는 밀려들어오는 북한군 병력에 사격을 집중하여 도하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군병력은 급격한 전선 투입으로 통신 체계나 부대간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조직적인 방어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에 많은 손실을 입고 결국 통진으로 분산 철수하고 말았다. |
| 참고 문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2, 서울인쇄, 2005, 247-248쪽.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 신오성, 1995, 157-15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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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포내리 |
|---|---|
| 주소 | 경기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산38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6·25전쟁사』2권에 의하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제6사단이 문수산 정면 한강을 도하하려 하자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예하 병력이 김포반도 북단 문수산을 중심으로 북쪽 한강변의 조강리-강령포 그리고 서쪽의 염하변에서 각각 도하저지 전투를 수행하였음이 확인된다. |














문수산 대안에서 본 문수산 주변 고지들
문수산 전투지 - 문수산 입구
문수산 정상
문수산 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