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미 군사고문단 본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가수호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후방지역작전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당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미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면서 한국에 남아 국군을 교육 및 훈련시킨 미 군사고문단의 본부가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미 군사고문단(KMAG)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은 1949년 6월말 주한 미군이 모두 철수한 후 설치되었으나, 1950년 1월 26일 미국과 맺은‘주한미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에 따라 사후 명문화되었다. 북한군의 남침 직후 6월 27일 미 군사고문관들은 김포로 이동하여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이들은 7월 13일 미 제8군사령부가 대구에 설치되자 한국군을 지원하여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1952년 대구에 설치된 미 제8군 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하자, 주한 미군사고문단 사령부 역시 서울로 복귀하였다. 1971년 4월 주한미합동군사고문단(JUSMAG-K)으로 바뀌었다. 미 군정 시기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등의 전투훈련 및 사격술, 포격술 등의 훈련을 담당했던 고문단은 미군 철수 후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의 집행과 감독, 미군무기의 이양과 훈련, 교육기관의 정비에 기여했다. 전쟁 중 미 고문관들은 국방부, 육본, 참모학교, 포병학교 등을 비롯해 각 사단에 배치되었고,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 한국군에 대한 10일분의 탄약을 즉시 부산항으로 보내줄 것을 호소하는 긴급 전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전쟁시기에는 그 규모가 1,000여 명에 이르렀고, 점차 작전지휘보다는 교육훈련에 큰 역할을 했다. |
| 참고 문헌 |
『대한민국 관보』제352호, 1950년 4월 3일, 「주한미국군사고문단에 관한 협정」. 서울신문사,『 주한미군 30년』, 1979, 117-124쪽. 해럴드 노블,『 비록, 전화속의 대사관』, 한섬사, 1980, 18쪽. 이치업·스티븐 M. 달프,『 번개장군 이치업』, 원민, 2001, 28-3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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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5가 |
|---|---|
| 주소 | 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2-1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38길 21 |
| 위치 고증 | 백선엽 장군과 당시 미국 대사관에 근무한 해롤드 노블(Herold Noble) 1등 서기관 등의 증언에 근거했다. |














미 군사고문단 본부 터 앞 미군부대 게이트
서울 철수 명령을 받고 김포비행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미 군사고문단(1950년 6월 27일)
미 군사고문단 본부 터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