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홍병기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소격동 119번지 앞마당과 인도로 편입된 상태이다. |
| 정의 |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홍병기가 3·1운동 당시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천도교/정의부/고려혁명당 |
| 관련 인물 | 권동진(權東鎭)/손병희(孫秉熙)/오세창(吳世昌)/박인호(朴寅浩)/최동희(崔東羲)/김봉국(金鳳國)/양기탁(梁起鐸) |
| 관련 내용 |
홍병기(洪秉箕, 1869∼1949)는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동학에 입문해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박인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생활 중이던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귀국해 진보회(進步會)의 조직과 갑진개화운동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천도교 측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6년 길림에서 최동희·김봉국 등 천도교 혁신파가 정의부와 연합해 양기탁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창당할 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피체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2, 1990, 37∼39쪽. 「손병희 등 48인 예심종결결정」, 1919년 8월 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손병희 등 48인 판결문」, 1920년 8월 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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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소격동 122 |
|---|---|
| 주소 | 서울 종로구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5길 56 |
| 위치 고증 | 1919년 8월 23일 고등법원의 「홍병기 신문조서」(『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2), 「손병희 등 48인 예심종결결정」, 「손병희 등 48인 판결문」등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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