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희승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문화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2008년 조사 당시 기본 골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곱은자 집으로 후대에 대문간의 외양간과 창고 등을 살림방으로 개축하며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의 구조였다. 주향은 남향으로 안마당에 낙수물이 모여 바깥마당의 텃밭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었다. 봉당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빌라로 재건축되어 멸실되었다. 재건축된 건물의 ‘양지 공인중개사’ 김나령 대표를 통해 2008년 조사 사진에서 집 우측 하단에 있는 돌의 위치가 기억난다면서 현 건물의 돌의 위치를 확인시켜줌으로써 생가 터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
| 정의 |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의 생가 터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42 조선어학회사건 |
|---|---|
| 관련 조직 | 조선어학회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이희승(李熙昇, 1896.6.9 ~ 1989.11.27)은 의왕시 포일동 출신으로 1918년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경성제국대학 상과를 수료하였다. 1930년 3월 관립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경성사범대학 교유에 취임하며 조선어학회에 입회, 1932년 조선어학회 간사를 맡았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가 민족정신을 계승하는 민족운동 단체로 규정, 소위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에 근거함과 아울러 치안유지법을 어긴 내란죄의 주동단체로 규정, 관련 학자를 검거하였다. 이로 인하여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 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었고, 그리고 증인으로 붙잡혀간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
| 참고 문헌 |
「이희승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극로 등 5인 판결문」, 1945년 8월 13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8, 1976, 987∼1025쪽. 의왕시사편찬위원회,『의왕시사』2, 2007, 132∼134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경기도, 2006, 164쪽. 이희승,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창작과비평사, 1996, 16∼20쪽. 장신,「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과 민족서사의 탄생」『한국독립운동사연구』5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공훈전자사료관(이희승, https://e-gonghun.mpva.go.kr)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경기도 수원군 의왕면 포일리-002(임야원도_0062)」,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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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 |
|---|---|
| 주소 | 경기도 의왕시 양지편로 13(포일동 87-3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희승 공적조서」에 의하면 본적지는 경기도 개풍군 임하면 상조강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극로 등 5인 판결문」에는 본적지와 주소지가 모두 경성부 서대문통 죽첨정 2정목 65-27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의 거주지는 서울 종로구 동숭동 25의 1이다. 그러나 이희승의 회고록『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에는 생가가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 원전지는 개풍군 임하면 상조강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의왕시사』2권에도 가옥의 위치와 사진 등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















이희승 생가 멸실 전 모습(2008년 촬영)
이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