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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양한묵 생가 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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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당시 건물은 없어지고 밭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희춘(현 소유주)의 증언에 의하면, 1957년경 5컨 접집이었던 초가를 허물었다고 한다.
정의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옥중 순국한 양한묵이 태어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09.12.22 이재명의 이완용저격사건/1919.3.1 3·1독립만세시위
관련 조직 헌정연구회 
관련 인물 손병희/이재명/오세창/권동진/최린/임예환/권병덕/김상규
관련 내용 양한묵(梁漢默, 1862~1919)은 37세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던 중,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5년에 귀국하여 같은해 5월에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고, 이듬해 천도교종부(天道敎綜部)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에 취임하였다. 1909년 12월 22일 발생한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李完用)저격사건에 연루되어 12월 하순 체포되었다가 1910년 4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19년 2월 25일경 손병희·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적극 참여하기로 약속했다.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 등과 함께 재동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이후 출동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1919년 5월 26일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양한묵 신문조서(1909.12.29)」,『총리대신이완용모살미수사건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양한묵 제2회 신문조서(1910.1.7」,『총리대신이완용모살미수사건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양한묵 제3회 신문조서(1910.1.22)」,『총리대신이완용모살미수사건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한민보』, 1919년 8월 16일,「대조선독립단 대표 양한묵 선생의 별세」.
『동아일보』, 1922년 5월 6일,「양한묵 선생 반장에 대하야, 사와 영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479쪽.
해남군사편찬위원회,『해남군사』, 해남군, 1995, 501~503쪽.
『해남신문』, 2008년 1월 18일,「1월의 독립운동가 양한묵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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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영암군 옥천시면 영신
주소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447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독립운동사자료집』11권과『신한민보』1919년 8월 16일자 등에서 양한묵의 활동을 확인하였다. 「양한묵 신문조서」에 주소지가 전라남도 능주군 오도면 율치로 되어 있으나, 후손 양회삼(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의 증언으로 생가가 영암군 옥천사면 영신리임을 확인하였고 위치를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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