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시장정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멸실 / 시장은 없어지고, 건물이 들어 서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8일 대구부 시장정에서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펼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경 대구부 시장정의 서문외장터(현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대구지역은 물론, 대구·경북지역 3·1만세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여기에는 이만집·김태련 등을 비롯하여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大邱公立高等普通學校)·계성학교(啓聖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시장정(市場町)의 서문외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고창하며, 본정(本町)·경정(京町)·동성정(東城町) 일대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일본 경찰에게 157명이 체포되었다. 주도인물인 이만집은 징역 3년, 김태년은 2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서문외장터(서문시장) 만세시위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3·1만세운동이었다. ‘서문외시장’라 함은『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의 읍시(邑市), 즉 대구시장을 말하는 것으로써 대구읍성(大邱邑城) 서문 밖에 위치하였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큰 장으로도 불리며, 개시일은 음력 2일과 7일이었고, 위치는 서문 밖 300m 서쪽 구신천(舊新川) 강변에 걸쳐 있었다. 대구부의 발전에 따라 서문외시장은 1923년 9월 현재의 대신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참고 문헌 |
『신한민보』, 1919년 5월 6일, 「대구 학생의 대활동 전말, 이만집·백남채씨의 피착」. 「이만집 등 판결문」, 1919년 5월 3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대구지적도」, 1927(대구향토역사관 소장).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24쪽.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Ⅰ, 東京:原書房, 1967, 338쪽. 김의환,「대구 3·1독립운동의 고찰」,『대구사학』7·8, 대구사학회, 1973, 6∼1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1264∼127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1971, 347∼354쪽. 권영배, 「대구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주도층」, 『조선사연구』6, 조선사연구회, 1997, 126∼12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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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시장정 |
|---|---|
| 주소 | 대구 중구 동산동 1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만집 등 판결문」과『고등경찰요사』 및 『조선독립운동』1권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향토역사관 증언과 1927년「대구지적도」를 통해 대구부 시장정에 있던 서문외장터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














시장정(「1:10,000(昭和12年修正測圖)」, 1937,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1910년대 서문시장
1910년대 서문시장
시장정 서문치안센터 앞 도로
시장정 골목에서 서문치안센터 방향
시장정 서문치안센터에서 시내 방향
시장정 서문치안센터 옆 골목
시장정 3·1운동 관련기사(『신한민보』, 1919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