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 지역별
  • 운동별

사적지 찾아보기

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괴산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거리(시장)
상태 변형 / 현재도 5일장이 서지만, 상가가 많이 들어서 있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정의 1919년 3월 19일, 24일, 29일, 30일 및 4월 1일 등 다섯차례에 걸쳐 괴산군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3.19·24·29·30 괴산군 괴산장터 독립만세시위/1919.3.19 괴산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시위/1919.4.1 괴산군 괴산면사무소 앞 독립만세시위
관련 조직  
관련 인물 홍명희(洪命憙)/손병희(孫秉熙)/이재성(李載誠)/홍용식(洪用植)/곽용순(郭容淳)/홍성희(洪性憙)/구창회(具昌會)/김인수(金仁洙)
관련 내용 고종의 인산에 참례 차 상경하였던 홍명희(洪命憙)는 손병희(孫秉熙)로부터 괴산군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부탁받고,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1919년 3월 19일 괴산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9일 괴산장터에는 수천명의 인파가 몰렸고, 홍명희를 비롯한 주도자들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홍명희·이재성(李載誠)·홍용식(洪用植) 등 18명을 체포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압수하였다. 같은 날 괴산공립보통학교 4학년 급장 곽용순(郭容淳) 등 35명도 만세 시위를 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다음 장날인 3월 24일에는 홍명희의 동생인 홍성희(洪性憙)의 주도하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는 괴산면 서기인 구창회(具昌會), 소수면 서기인 김인수(金仁洙)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곧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홍성희가 붙잡히자 분노한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더욱 높이 외쳤다.

3월 29일 장날에는 밤 6시경 약 1,500여 군중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높였으며, 다수의 군중들이 경찰과 충돌하였다. 만세시위는 이튿날인 30일에도 계속되었다. 이 때에도 수많은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벌이며 경찰서로 몰려가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이때 일제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순국하고 2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1일에는 다시 1,000여 명의 시위군중들이 괴산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9일부터 시작된 괴산장터의 만세시위는 충북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문헌 「홍명희 3인 등 판결문」, 1919년 4월 1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홍성희 5인 등 판결문」, 1919년 4월 1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55~5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1079~1082쪽.
金正明, 『朝鮮獨立運動』 Ⅰ, 原書房, 1967, 403·406·436·468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서부리
주소 충북 괴산군 산읍동부리, 서부리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홍명희 3인 등 판결문」·「홍성희 5인 등 판결문」 및 『조선독립운동』 1권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향토사학자 김근수 및 이춘택의 증언을 통해 당시 위치를 확정할 수 있었다.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삼방로 95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