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한천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변형 / 현재 장은 열리지 않고 있다. 마을 북서쪽에는 2002년 한천장터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이 조성되었으며, 그 안에 ‘한천3·1만세사적비’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중동교 옆에 위치한 마을유래비에서도 3·1운동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 정의 | 1919년 4월 1일 소이면 주민들이 만세시위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년 4월 1일 음성군 소이면 한천장터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을경(金乙卿)/이중곤(李重坤)/이용호(李龍浩)/추성렬(秋成烈)/이교필(李敎弼),/권재학(權在學) |
| 관련 내용 |
1919년 4월 1일, 한천장터에서는 김을경 등의 주도로 1,000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원래 김을경은 만세시위 이전 한천면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도록 설득했던 인물이지만 이후 이중곤과 협의한 후 권재학·추성렬·이교필·이용호 등과 함께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지휘하여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을경·이중곤은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 민병식을 면사무소 앞뜰로 끌어내어 함께 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다가 체포되어 소이면 경찰관주재소에 감금되었다. 이에 권재학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서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또한 추성렬과 이교필은 집으로 돌아가는 군중들을 설득하여 김을경과 이중곤을 구출하려 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이 발포하여 시위를 진압하면서, 시위대 중 사망자 6명·중상 9명·경상 20~30명이 나왔다고 전한다. 만세시위는 주모자 2명을 검거하고 오후 11시경 겨우 진정되었다. 김을경은 징역 1년 6개월, 이중곤·권재학은 징역 1년, 추성열·이교필은 징역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김춘흥·이상근·이용호는 태 90도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1991년 이용호에게 애국장, 1990년 김을경·이중곤·권재학에게 애족장, 1993년과 2013년에 추성렬·김춘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 「충주」,『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1918. 「김춘흥 외 1인 판결문」(1919년 5월 13일, 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김을경 외 5인 판결문」(1919년 5월 22일, 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김을경 외 4인 판결문」(1919년 7월 24일, 경성복심법원). 「김을경 외 4인 판결문」(1919년 10월 2일, 고등법원). 「朝鮮總督府 內秘補 433;忠北機第269號: 地方狀況報告」, 1919년 4월 5일,『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4. 「朝鮮總督府 內秘補 460;忠北機第276號: 地方狀況報告」, 1919년 4월 8일,『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4. 「朝憲警 第107號: 朝鮮騷擾事件一覽表에 關한 件」, 1919년 10월 2일,『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1086~108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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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
|---|---|
|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1062-3(한불로 710-1)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서 위치를 확인하였으며 김을경의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마을유래비에도 관련 기록이 확인되며 2008년 조사 당시 주민 이종헌(중동리 거주)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한천 3·1운동 사적비
소이면사무소 터
한천장터 전경
소이경찰관주재소 터
한천장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