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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기송 집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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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건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밭으로 변해버렸다.
정의 1919년 3월 23일 오수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기송이 살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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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관련 인물 오병용/이만의
관련 내용 이기송(李起松, 1888~1939)은 임실지역 유지로서 1919년 3월 23일 둔남면 오수장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미 오수리에서는 3월 10일 오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임실군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본인 교장이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모에게 시위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여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 때 이기송은 오병용(吳秉鎔)·이만의(李萬儀) 등과 연락하여 장날인 3월 23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날 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하여 호소하고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시위군중들이 점점 불어나 800여 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경찰주재소에서 순사가 출동하여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격분한 8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들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가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당황한 일본인 순사가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만세시위군중은 다시 2,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렬해졌다. 만세시위의 대열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이 날 저녁 남원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무장한 병력이 대거 출동하여 시위대열과 대치하다가 무자비한 발포로 일단 해산되었으나, 시위군중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튿날부터 단행된 검속에 의하여 붙잡힌 이기송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이기송 등 23인 판결문」, 1919년 7월 3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기송 등 14인 판결문」, 1919년 9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기송 등 판결문」, 1919년 10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병헌,『삼일운동비사』, 시사시보사 출판국, 1959, 90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504~507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신기리
주소 전북 임실군 오수면 신기리 315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이기송 등 23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지번은 전주이씨 문중의 일원인 이강환(72)·이강하(65)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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