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재락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원형보존 /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
| 정의 | 울산군 온양면 남창리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일제시기 군자금모집 활동을 전개한 이재락이 태어나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4.8 울산군 남창리 독립만세시위/1926.3 김창숙 등 군자금모집사건(경북유림단사건) |
|---|---|
| 관련 조직 | 웅촌청년회 |
| 관련 인물 | 이수일(李樹一)/김창숙(金昌淑)/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
| 관련 내용 |
이재락(李在洛, 1886~1960)은 1886년 울산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이석륜(李錫倫)과 김안(金安)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고종 인산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3·1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중에 알리고 온양면 남창리의 이수일(李樹一) 등에게도 알려 1919년 4월 8일 남창리에서의 만세시위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한편 그는 김창숙(金昌淑) 선생과 사돈간으로 김창숙의 군자금모집 활동에도 적극 협력하였다. 김창숙이 1925년 내몽고 군사기지 건설을 위해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왔을 때 스스로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당초 계획했던 20만원이 미달하자, 1926년 3월 범어사에서 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회를 거듭하여 소액을 제공한 국내 부호들에게 거액을 요구하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다가 1926년 3월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외 민립대학 설립 발기인이기도 하며, 웅촌청년회 고문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蔚山郡 熊村面 石川里 地籍原圖」, 1912. 「송영후 등 12인 판결문」, 1927년 3월 2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7년 2월 11일, 「유림단사건진상(일)」. 『동아일보』, 1927년 2월 12일, 「유림단사건진(이)」. 『동아일보』, 1927년 2월 13일, 「유림단사건진(삼)」. 『동아일보』, 1927년 2월 14일, 「유림단사건진(사)」.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83~28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209~210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2, 1977, 308~332쪽. 남부희, 「제2차 유림단의거 연구(1)」, 『경희사학』 18, 경희사학회, 1993, 125~149쪽. 남부희, 「제2차 유림단의거 연구(2)」, 『경희사학』 19, 경희사학회, 1993, 273~300쪽. 울산정책연구소, 『울산의 독립운동사』, 항일독립사재조명위원회, 2008, 24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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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울산군 웅촌면 석천리 302 |
|---|---|
| 주소 |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302 |
| 도로명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32-3 |
| 위치 고증 | 「송영후 등 12인 판결문」 및 『독립운동사』 3권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송영후 등 12인 판결문」과 이재락의 「제적등본」에 기재된 주소지를 「울산군 웅촌면 석계리 지적원도」와 현재 지적도를 상호 비교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














유림단사건 재판장면(『동아일보』, 1927년 2월 14일)
우측에서 본 이재락 생가 사랑채
마당에서 본 이재락 생가 사랑채
이재락 생가 사랑채
이재락 생가 원경
중앙에서 본 이재락 생가 내부
이재락 생가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