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영산 전투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가수호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낙동강방어작전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시내 개발로 인해 당시의 모습과 매우 차이가 난다. |
| 정의 |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미 해병대와 미 제9연대가 북한군 제9사단과 전투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낙동강돌출부 작전, 창녕 전투 |
|---|---|
| 관련 조직 | 미 제8군사령부, 미 제2사단, 미 제1해병여단, 북한군 전선사령부, 북한군 제9사단 |
| 관련 인물 | 워커 중장, 카이저 소장, 김책 |
| 관련 내용 |
북한군 제4사단은 1950년 8월 10일 야음을 이용하여 오항나루터와 박진나루터 일대에 수중교 가설작업을 완료하고 도하를 개시하였다.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 제4사단은 미군진지 좌측방으로 우회하여 영산 후방으로의 침투를 기도하였다. 8월 11일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 전투지경선에 위치한 남지교가 북한군에게 피탈되고 영산이 북한군의 포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후 미 제24사단 수색대는 영산 남쪽으로 우회한 북한군과 조우하였다. 이에 미 제24사단은 미 제14공병대대를 영산에 투입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영산 남쪽과 동쪽 일대의 북한군이 약 2개 대대 병력일 것으로 판단하고, 예비인 미 제27연대 주력을 투입하여 소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영산 북쪽에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연대는 영산에 집결한 미 제14공병대대와 증원된 미 제2사단 제23연대 와 함께 영산주변의 북한군을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였다. 북하군은 8월 전반기 공세가 실패하자, 전선사령관 김책은 8월 20일 각 군단에 재차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영산 정면의 북한군 제9사단이 8월 31일 오후 10시를 기해 공격하였다. 영산 정면의 미 제2사단 제9연대는 북한군 제9사단의 기습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많은 손실을 입은 채 강안진지가 돌파되었다. 9월 1일 아침까지 미 제2사단은 거의 전 지역이 적에 의해 돌파되어 방어지역이 창녕과 영산으로 양분되었다. 이에 워커 미 8군사령관은 9월 2일 미 제1해병여단을 제2사단에 배속, 영산 서쪽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오히려 미 제2사단 1대대를 포위하고 이들을 구원하러 온 미 38연대 3대대를 공격하여 9월 3일 영산을 점령하였다. 워커 장군의 독전으로 9월 4일 미 제9연대장은 영산 동쪽 지휘소에서 철수부대로 재편성한 800여 명의 병력과 전차를 이끌고 영산을 역습함으로써 탈환하였다. 한편 이에 앞서 미 해병대 역시 9월 3일부터 영산 서쪽을 공격하였다. |
| 참고 문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5, 2008, 267-270쪽.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319-32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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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
|---|---|
| 주소 |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산 4 일대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남산공원길 56-17 일대 |
| 위치 고증 | 『6·25전쟁사』5권에 의하면,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북한군 제9사단의 기습공격에 대해 미 제9연대와 미 해병대가 영산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것으로 확인된다. |














영산전투에 투입되어 전투 중인 미군(1950년 9월)
영산 시가지 동쪽
영산시가지 전경
영산전투 소개판
영산전투 전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