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신규식·신건식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집의 원형이 변형되었다. |
| 정의 |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신규식과 신건식 형제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문동학원/박달학원/중국동맹회/동제사/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관련 인물 | 신채호(申采浩)/신백우(申伯雨)/나철(羅喆) |
| 관련 내용 |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신용우(申龍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채호(申采浩)·신백우(申伯雨)와 함께 '산동삼재'(山東三才)로 유명했다. 신규식은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부위(副尉)로 진급하였다. 1901년 향리에 문동학원(文東學院)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上海]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는 등 구국교육활동에 힘썼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음독자결을 기도하여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흘겨보는 상이 되므로 스스로를 예관(睨觀)이라고 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자살하려고 하였으나 나철(羅喆)에 의하여 구원되었다.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정(申檉)으로 개명하고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맹한 뒤 10월의 무창의거(武昌義擧)에 참가하여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1912년에는 상하이에 교민이 늘어남에 따라 독립운동을 위한 교민단체로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이사장이 되었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법무총장으로, 그 후에는 다시 총리대리로 외무총장까지 겸직하다가 1922년 3월에 모두 사직하고 병으로 요양하다가 9월 25일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건식(申健植, 1889~1963)은 신규식의 10살 아래의 동생으로 1912년 신규식이 창건한 동제사에 가입한 이래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1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가지고 돌아가다가 압록강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불구의 몸이 되었다. 1922년 병보석으로 신의주감옥에서 출소한 후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39년 10월 이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1943년 3월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주중대표(駐中代表)로 있다가 귀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신규식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건식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신문』, 1919년 9월 2일, 「 임시정부 개조안」. 『독립신문』, 1922년 9월 30일, 「신규식선생 장서」. 『동아일보』, 1921년 12월 31일, 「신건식씨 체포, 청주에서 또 취조」. 『동아일보』, 1922년 9월 27일, 「신규식씨 장서, 파란이 만흔 일생을 뒤로 두고, 이십오일 상해 려창에서 장서」. 『신한민보』, 1922년 11월 2일, 「신규식선생의 장서」. 『동아일보』, 1923년 9월 23일, 「 신예관기념제, 어언간 일주년」. 강영심, 「신규식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225~25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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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문의군 동면 계산리 |
|---|---|
| 주소 |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13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신규식 공적조서」와「신건식 공적조서」 등에 본적지가 "충청북도 문의군 동면 계산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신건호(인차2리 거주, 63세)의 증언에 의해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로 위치를 확정하였다. |














신건식과 박찬익
신건식
신규식
신규식 묘소
신규식·신건식 집터 입구
신규식·신건식 묘소에서 바라본 집터 원경
신규식·신건식 집터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