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보신각 앞 3·1운동 만세시위지/ 한성정부 선포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부분변형 / 현재 보신각은 도로확장으로 본래 위치에서 서남편으로 약 40m 물러나 옮겨진 상태이다. |
| 정의 | 3·1독립만세시위의 중심지이자, 1919년 4월 23일 세칭 ‘한성정부’의 수립을 알리는 시위가 벌어진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1919 국민대회 개최/1919 한성정부 수립 선포 |
|---|---|
| 관련 조직 | 한성정부 |
| 관련 인물 | 장채극(張彩極)/전옥영(全玉瑛)/이철(李鐵)/김유인(金裕寅) |
| 관련 내용 |
종로 보신각 앞은 1919년 3월 1일 시위 군중들의 타종을 시작으로 서울지역 3·1독립만세시위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었다. 학생단 주도로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대로 나뉘어졌던 시위대가 정오경 이곳에 모여 독립연설회를 개최하였고, 3월 9일부터 상인들의 동맹 철시가 단행될 때도 그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한성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4월 23일의 국민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비록 당초 계획했던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무산되어 학생으로 보이는 몇 명이「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선포문」을 뿌리고, ‘국민대회 공화만세’라는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데 그쳤지만, 이 날 국내 ‘13도 대표’ 25명 명의로 배포된 ‘한성정부’ 선포 문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
| 참고 문헌 |
『매일신보』, 1915년 6월 13일, 「종각 이전」.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 6, 10, 57보)」 ;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5, 동경:みすず書房, 1966, 284·291·299~300·38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116~1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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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종로2정목 |
|---|---|
| 주소 | 서울 종로구 관철동 45-3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일본 육군성 문서인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 2, 6, 10, 57보)」와 『독립운동사자료집』 13 등에 종로 보신각 앞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도로 확장으로 인해 당시 위치보다 뒤로 물러난 보신각
보신각
제일은행에서 본 보신각 앞 3.1운동 만세시위지 - 현 종로사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