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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남대문역전 학생단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거리
상태 부분변형 / 도로확장과 역사 신축 등으로 주변 경관이 일부 바뀌었다.
정의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 학생단이 주최한 독립만세시위가 있었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학생단 
관련 인물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璧)
관련 내용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경 학생단의 주도면밀한 사전 준비 속에 남대문역 광장에 모여든 군중은 수만 명을 헤아렸다. 학생단 대표로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과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이 각각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 크게 쓴 기를 휘두르며 달려와 제2차 독립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하자,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선두에 선 김원벽과 강기덕의 지휘에 따라 남대문 방향으로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붉은 완장을 두른 학생들이 격문을 뿌렸고 시위에 동참하는 군중은 더욱 늘어났다.

남대문 앞에서 시위대를 제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관헌에 의해 김원벽·강기덕 등 지도부가 체포된 뒤, 검속을 면한 시위대는 여러 대로 나뉘어 한 무리는 남대문시장에서 조선은행 앞을 지나 종로 보신각으로 향하고, 또 한 무리는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과 무교정을 거쳐 종로 보신각으로 향했다. 대한문 앞에서는 약 1만 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고, 종로 보신각 앞에서는 정오 무렵 여러 대로 나뉘어졌던 시위대가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강제 해산당하였다.

3월 5일 시위 이후 일제 관헌이 독립시위를 기획하는 학생과 일반인을 대대적으로 검문했기 때문에, 이후 서울 중심가에서의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못했다.
참고 문헌 『동아일보』, 1921년 12월 20일, 「南大門驛 假移轉, 명 이십일일에 가역사로 리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106~107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성부 봉래정 2정목
주소 서울 중구 봉래동2가 122
도로명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26
위치 고증 『독립운동사자료집』 13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남대문역은 1900년 7월 경인선 개통 당시만 해도 종착역인 서대문역 사이에 지어진 조그만 간이역에 불과했다.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에 이어 1914년 경원선까지 개통되면서 서울 도심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역할이 커지자, 일제는 1915년 새롭게 역사를 신축하였다. 그리고 1922년 6월 국제 수준의 대규모 신역사 공사에 착수하여 1925년 9월 완공하였다. 신역사가 계획되기에 앞서 1919년 서대문역이 폐지되면서 남대문역은 사실상 경성역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는데, 1923년 1월 명칭까지 남대문역에서 ‘경성역’(현 서울역)으로 변경됨으로써 명실공히 식민지 수위도시의 관문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3·1운동 당시 남대문역의 위치는 신역사 착공에 앞서 ‘1921년 12월 역사를 임시역사로 이전한 뒤, 기존 역사는 헐고 신역사 건축에 착수할 터’라는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현재의 구 서울역사 자리와 같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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