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인천 만국공원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기타 |
| 상태 | 변형 / 인천의 시가지와 서쪽의 월미도를 바라보는 항만의 풍경이 간직된 만국공원은 부분적으로 변형되었으며, 1957년 10월부터 자유공원으로 불려지며 같은해 9월 15일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
| 정의 | 1919년 3월 9일 인천에서의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자, 4월 2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9 인천 만국공원 독립만세시위/1919.4.2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회의 개최 |
|---|---|
| 관련 조직 | 대한국민의회/한성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
| 관련 인물 | 이교헌(李敎憲), 윤이병(尹履炳), 윤용주(尹龍周), 최전구(崔銓九), 이용구(李容珪), 김규(金奎), 이규갑(李奎甲), 홍면희(洪冕熹), 안상덕(安商悳), 이승만(李承晩), 이동휘(李東輝) |
| 관련 내용 |
만국공원(萬國公園)은 1888년 11월 9일에 조성되어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이 공원이 제물포항(인천항) 개항 이후 개항장 일대에 설치한 각국 조계(租界)지역의 완충지대였기 때문이다. 조계 지역은 조선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미국·영국·러시아·청국·일본 등 각국의 외교관들이 공동서명하고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J.Scredin.Sabatine)이 측량해 공원의 모습을 갖췄다. 1919년 3월 7일과 8일 인천부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3월 9일에는 만국공원과 시내에 수백명의 시위대가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해산하였다. 이외 상인들은 상가철시 등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3월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윤용주(尹龍周)·최전구(崔銓九)·이용구(李容珪)·김규(金奎) 등이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하였다. 인천시내 만세운동이 잦아들던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이규갑·홍면희(洪冕熹)·안상덕(安商悳) 등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이 임시정부가 상해 및 노령 대한국민의회와 더불어 3대 임시정부의 하나로서 임시정부 정통성의 근간이 된 '한성임시정부'이다. 13도 대표들은 임시정부 선포문을 통하여 '3·1민주혁명을 바탕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 대회는 민의에 기(基)하여 임시정부를 조직, 약법(約法)을 제정하여 이를 선포한다'라며 국민대회 취지를 포고하였다. 따라서 한국이 독립국임과 함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이때 발표된 정부 주요 인사는 이승만(李承晩)·이동휘(李東輝) 등 24명이었다. 이후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 공포되면서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통합하게 되었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135쪽.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사』 2, 인천광역시, 2002, 656쪽. 인천광역시·인하대박물관, 『인천문화유적분포지도』, 2005, 112쪽.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근대문화로 읽는)한국최초 인천최초』, 2005, 22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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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
|---|---|
| 주소 | 인천 중구 인천광역시 중구 자유공원남로 3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만국공원은 1888년 11월 9일에 조성된 한국 최초의 공원이며, 1914년부터는 서공원(西公園)으로 불렸고, 1957년 10월부터 자유공원(自由公園)으로 불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