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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강화읍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거리
상태 변형 / 강화 3·1운동은 강화읍내 전체를 배경으로 한 운동이지만, 1996년에 운동의 주 무대인 은혜교회 앞에 만세기념비를 조성하였다.
정의 1919년 3월 18일 강화지역 주민 20,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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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관련 인물 황도문(黃道文)/황유부(黃有富)/염성오(廉成五)/김유의(金有義)/장윤백(張允伯)/장흥환(張興煥)/이사국(李思國)/유봉진(劉鳳鎭)
관련 내용 1919년 3월 5일경 유봉진은 서울의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한 선두리의 황도문으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경위를 듣고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심하였다. 이후 3월 9일 길직리교회에서 길직리의 조종열·조종환·장윤백·장명순·장동원·장기흥·장상용·장삼수·장덕기·장흥환과 선두리의 황유부·황도문·염성오·유희철·황명희·홍관후, 온수리의 유봉진, 상방리 이진형 목사 등이 회합하여 만세운동 계획을 모의하였다. 유봉진은 강화도 다른 지역에 잠행하여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한편 황윤실·황일남·조상문·장동원·장명순·유희철은 만세운동에 앞장서기로 결의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독립선언문 등 유인물은 선두리교회의 황도문 등이 인쇄하고, 잠두교회 전도부인인 김유의를 통해 읍내로 반입하였다.

3월 18일은 강화에 장이 열리는 날로, 오후 2시가 되자 결사대를 선두로 하여 강화읍 신문리와 관청리 사이의 돌다리 부근에서 만세를 먼저 부르기 시작하여 관청리 장터, 향교, 군청, 경찰서로 진격해 갔다. 군청과 장터 등에 모인 인파는 20,000여 명으로 전국 최대의 지방시위가 되었다.

한편 유봉진은 강화읍내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독립을 알렸다. 밤 11시경까지 계속된 시위는 독립연설회와 체포된 유희철 등의 석방 요구 등으로 이어졌다. 강화경찰서는 순사보 5명을 파견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일군 40명이 추가 출동하였다.

다음날 온수리에서 계속 만세시위를 하려 했으나, 증파된 군과 경찰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명의 읍내 시위가 이어지는 등 이후 강화도 전역에서는 약 1개월에 걸쳐 심야 횃불시위, 만세시위가 지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43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참고 문헌 「유봉진 등 판결문」, 1919년 12월 1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335~343쪽.
강화군사편찬위원회, 『신편 강화사』상, 2003, 644-650쪽.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사』 2, 2002, 658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관청리
주소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552
도로명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440번길 10
위치 고증 「유봉진 등 신문조서」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신편 강화사』등에는 강화 3·1운동 만세시위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강화읍 장터 및 향교, 군청, 경찰서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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