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준승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장시간 방치되어 본채는 사라지고 행랑채만 남아있다. |
| 정의 |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의 한 명인 박준승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영원(金榮遠)/전봉준(全琫準)/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김상규(金相奎) |
| 관련 내용 |
독립운동가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박준승(朴準承, 1866∼1927)은 임실 천도교계의 지도자인 김영원의 영향으로 1891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이 처형당한 후에도 지하활동을 계속하였고, 손병희의 개혁운동에 동참했다. 1897년에 접주(接主)가 되었고, 1908년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 전라남도 장성군 천도교대교구장 겸 전라도순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16년에는 전라도지역 천도교계의 최고지도자에 임명되었다. 1919년 2월경 손병희로부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교도들을 통해 선언서 5,000매를 배부하여 장성·남원·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 해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린·임예환·권병덕·나인협·홍기조·김완규·나용환·홍병기·양한묵 등과 함께 김상규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28일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을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관한 최종 검토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신한민보』, 1919년 4월 19일, 「내지 혁명 소식: 인도자 일백삼십사 포착, 대표자 이십구인 검사」. 「박준승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손병희 등 48인 예심종결결정」, 1920년 3월 2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492∼50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4, 1971, 11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8, 1976, 663쪽. 김승학,『한국독립사』하, 독립문화사, 1971, 1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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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602 |
|---|---|
| 주소 | 전북 임실군 |
|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옥석2길 11-14 |
| 위치 고증 | 「손병희 등 48인 예심종결결정」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주치마을에 거주하는 박준승의 손자 박복만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박준승 집
박준승 집 전경
박준승 집 본채 터
입구 쪽에서 본 박준승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