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유관순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
| 정의 |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유관순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4.1 천안군 갈전면 병천장터(아우내장터)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인원(趙仁元)/이소제(李少梯) |
| 관련 내용 |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재학 중 3·1운동을 맞은 유관순은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였다. 귀향한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柳重權), 숙부 유중무(柳重武)를 비롯해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4월 1일 장날을 이용해 갈전면 병천리 병천장터(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3월 31일 사전계획에 따라 갈전면 탑원리에 있는 매봉산 정상에 올라 다음날 만세시위가 전개될 것을 알리기 위해 횃불을 올렸다.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병천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출동하여 저지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헌병의 발포로 순국자가 발생하였다. 그녀는 군중들과 함께 병천헌병주재소에서 일제의 만행에 항의하고, 헌병들의 무력적 진압에 맞서 격렬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로 인해 그녀의 부친인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를 비롯해 10여 명의 순국자가 발생하고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여 명이 체포를 당했다. 그녀는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유관순 신상기록카드」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5, 1992, 319쪽. 「조인원 등 11인 판결문」, 1919년 6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 1161~1165쪽. 김진호, 『충남지방 3·1운동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82~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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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
|---|---|
| 주소 |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 |
|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
| 위치 고증 | 「유관순 신상기록카드」 및 「조인원 등 11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














유관순 수형기록부(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관순 생가(왼쪽)
유관순 생가 주변(오른쪽)
유관순 생가에 설치된 유관순 일대기 기록비
유관순 생가 전경
유관순 생가(우)와 현 매봉교회(좌), 지령리 교회 터(교회 앞 논)
유관순 생가 내부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추정)사진(1918경, 맨뒷줄 오른쪽이 유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