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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양명 생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운동계열분류 사회운동,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종류 가옥
상태 변형 / 30여 년 전 개보수하여 외관은 많이 바뀌었으나 가옥의 골격은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정의 중국 방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양명이 태어난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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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관련 조직 혁명사/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상해부 상해야체이카/레닌주의동맹/고려공산청년회/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조선공산당연구회 
관련 인물 김준연(金俊淵)/김세연(金世淵)/한위건(韓偉建)
관련 내용 양명(梁明, 1902~1945)은 통영군 사등면 사등리에서 양필(梁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무렵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대학 문과에서 수학하였다. 1924년 베이징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가입하고 잡지 『혁명』 발행에 참여했다. 1925년 8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정치부 기자가 되었다. 같은 달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2월 조선공산당 상해부 상해야체이카 위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표방하는 레닌주의동맹 결성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고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7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직을 사퇴한 그는 『조선일보』 해외특파원 자격으로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0월에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선전부 부원이 되었다. 11월 초 김준연(金俊淵) 책임비서로부터 모든 당무와 후계당 조직을 위임받았다. 그는 김세연(金世淵)을 후계 책임비서로 선정한 뒤, 1928년 초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 3월 무렵 조선공산당 정치부 위원이 되었다. 1929년부터 상하이에서 조선공산당 ML파 기관지인 『계급투쟁』을 발간하였고, 5월 조선공산당 재조직대회에서 중앙간부로 선임되어 한위건(韓偉建) 등과 함께 일본 도쿄[東京]와 국내의 RS협의회 같은 비밀결사 조직을 지도하였다.

1931년경 소련으로 망명한 그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연구원이 되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외 정세가 격변하자 다시 입국하여 김포군 내에서 조선공산당연구회를 조직하여 농촌을 중심으로 당재건 활동을 전개하다가 6월 김포경찰서에 체포되었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양명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준연 등 32인 예심종결결정」, 1928년 10월 2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준연 등 28인 판결문」, 1930년 8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朝鮮總督府 警務局,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 朝鮮總督府, 1934, 332쪽.
전갑생, 『거제이야기 100선』, 거제문화원, 2000, 80~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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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통영군 사등면 사등리 817
주소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 817
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사등3길 18-5
위치 고증 『국외에서의 조선인명부』 및 「김준연 등 32인 예심종결결정」·「김준연 등 32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제적등본」을 통해 지번을 확인하였고, 친척 양일웅씨의 증언으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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