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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대구은행 - 이종암 군자금 모금 활동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운동계열분류 의열투쟁
종류 건물
상태 변형 / 건물의 외부는 일부 남아있으나 내부는 사우나시설로 바뀌었다.
정의 1917년 12월 대구은행에 근무하던 이종암이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1만 9천원(圓)을 탈취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7.12 대구은행자금탈취사건
관련 조직 의열단 
관련 인물 이종암/구영필/이병태/이병호/김병환/이기양/배중세
관련 내용 이종암(李鍾岩)은 의열단(義烈團) 부단장이었다. 그는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업학교를 거쳐 부산상업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16년경 대구은행에 취직하여 출납계 주임으로 금고를 담당하였다.

이종암은 은행에 근무하면서 늘 독립운동에 뛰어 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12월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금고에서 1만 9천원(圓)을 꺼내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다 그는 일본 왕궁을 폭파할 생각으로 1925년 국내에 들어와 1만 9천원 중에서 7천원을 맡겨 놓았던 구영필(具榮珌)에게서 돈을 찾으려 하였다. 이종암이 국내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얻은 일본 경찰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이종암을 만났다는 이병태(李丙泰)·이병호(李丙浩)·김병환(金餠煥) 등을 붙잡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이종암이 달성군 달서면 노곡리(현재 대구시 노곡동)의 이기양(李起陽) 집에 은신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1925년 11월 5일 배중세(裵重世)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종암은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1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1930년 6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동아일보』, 1926년 11월 11일,「경북중대사건의 기일, 의열단 전후 활동 진상, 과거 칠년간 관계자 전후 삼십여명, 만일주년만에 해금된 양건호 사건」.
「이종암 등 9인 판결문」, 1926년 12월 2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대구지적도」, 1927(대구향토역사관 소장).
##中,『朝鮮銀行會社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23, 13~1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387~41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7, 1971, 516~5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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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북도 대구부 본정 1정목 52
주소 대구 중구 서성로1가 109-1
도로명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1
위치 고증 「이종암 등 9인 판결문」및『동아일보』1926년 11월 11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조선은행회사요록』(1923)에 대구은행의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1927년「대구지적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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