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서진문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당시 가옥은 없어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26년 도일하여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28년 10월 일본천황 암살을 기도하다가 순국한 서진문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
| 관련 인물 | 성세빈(成世斌) |
| 관련 내용 |
서진문(徐鎭文, 1903~1928)은 서장식과 유남련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울산군 동면 일산리 209번지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백부 서원준의 양자로 입적하여 거주지를 동면 일산리 206번지로 옮겨 자라났다. 일찍이 사립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시 동면공립보통학교로 전입하여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키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외숙부 성세빈이 설립한 일산의 사립 보성학원 교사로 활동하였다. 보성학원 교사 생활이 고정적이지 않았지만 그는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며 항일교육을 실시하다가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일경의 끈질긴 감시 속에서도 여자야학회를 개설하여 조선어·산술·수공 등을 교수하는 등 여자 교육계에도 헌신하였다. 그는 보성학원에 재직하면서도 일본에 여러 차례 드나들며 세계 정세와 재일 조선인들의 실상을 이해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항일 의식을 불태웠다. 1926년 일본 가나가와[神奈川] 현으로 건너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의 즉위식을 맞아 그를 암살하기 위해 즉위식장에 들어가려다 검거되었다. 요코하마 경찰서로 넘겨진 서진문은 심한 고문 끝에 빈사상태가 되어 11월 16일 석방되었으나 다음날 사망했다. 서진문의 유해는 일본에서 일산으로 운구되었는데, 그를 추모하는 조문객들이 길게 늘어섰고 외숙부 성세빈이 직접 운구를 옮기고 비문도 썼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울산군 동면 일산리 지적원도」, 1912. 「서진문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제4회 전국대회회록」,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1928년 5월 14일. 『동아일보』, 1928년 12월 7일, 「심장 각기 중 피검, 유치장에서 필경 절명, 울산군 출신 서진문」. 『동아일보』, 1929년 11월 27일, 「徐君추도회에서 동포 십 명 검속」. 김문술, 「서진문선생의 항일운동」, 『동구문화』 1, 울산동구문화원, 2005. 이현호, 「1920년대 울산 동면 지역의 사회운동」, 『지역과 역사』 20, 부경역사연구소, 2007, 261~265쪽. 울산정책연구소, 『울산의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재조명위원회, 2008, 270~27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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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울산군 동면 일산리 206 |
|---|---|
| 주소 | 울산 동구 일산동 206 |
| 도로명 주소 |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진11길 217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28년 12월 7일자 기사와 김문술의 「서진문선생의 항일운동」을 근거로 「울산군 동면 일산리 지적원도」와 현재 지적도를 상호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서진문 관련 장례식 장면
서진문 관련기사(『동아일보』, 1928년 12월 7일)
서진문 집터 입구(오른쪽이 생가 터 ;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206)
서진문 집터 원경
서진문 집터 근경
서진문 집터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