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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손후익 집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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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운동계열분류 국내독립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기존의 건물은 멸실되고 다른 대지에 포함되어 있다.
정의 일제시기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에 헌신했던 손후익이 살았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26 경북유림단사건
관련 조직 의열단 
관련 인물 김창숙(金昌淑)/손진인(孫晉仁)/곽종석(郭鍾錫)/이재락(李在洛)/김원봉(金元鳳)/유우근(柳友瑾)/한봉근(韓鳳根)
관련 내용 손후익(孫厚翼, 1888~1953)은 손진인(孫晉仁)과 이순구(李順久)의 사이에 장남으로 경상남도 경주군 강동면 오금리 601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 264번지로 이주하였다. 1905년 영남 유림의 을사조약 폐기상소에 연명으로 참가하였으며, 1912년 이후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또한 1923년 2월 김창숙(金昌淑)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권유를 받고 정수기(鄭守基)와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곽종석문집(郭鍾錫文集)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손후익은 김창숙이 국내 군자금 모금을 위해 영남일대를 순회하며 양산을 거쳐 울산으로 오는 길에 언양에서 차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자, 부친인 손진인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2개월간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런 와중에 김창숙의 계획에 뜻을 같이하여 경남의 울산·양산·동래 방면의 군자금 모집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모금한 금액이 예정했던 20만원에 미치지 못하자, 1926년 3월 10일 경남 범어사에서 김창숙·정수기·이재락(李在洛) 등과 회합하여 군자금 헌납에 불응하는 자와 소액 헌납자를 암살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의열단과 교섭하여 폭탄 및 권총을 입수하기로 하고 김창숙은 3월 16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의열단의 김원봉·유우근·한봉근과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손후익은 같은해 3월말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2.
「송영우 등 판결문」, 1927년 3월 2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손후익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7년 2월 11일, 「慶北儒林團事件眞相(一)」.
『동아일보』, 1927년 2월 12일, 「慶北儒林團事件眞相(二)」.
『동아일보』, 1927년 2월 13일, 「慶北儒林團事件眞相(三)」.
『동아일보』, 1927년 2월 14일, 「慶北儒林團事件眞相(四)」.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283∼28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2, 1977, 308∼332쪽.
남부희,「제2차 유림단의거 연구」(1)·(2),『경희사학』18·19, 경희사학회, 1993.
울산정책연구소, 『울산의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 재조명위원회, 2008, 276∼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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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 264
주소 울산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264
도로명 주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길 46
위치 고증 「송영후 등 판결문」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판결문」과「제적등본」에 기재된 주소지를「울산군 범서면 입암리 지적원도」와 현재 지적도를 상호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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