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차병한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집터에는 차병한의 손자인 차진갑(1947년생)이 거주하고 있으며, 현대식의 105평 2층 양옥집으로 변하였다. |
| 정의 |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장안면·우정면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지휘한 차병한이 거주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4.3 수원군 장안면 독립만세시위, 1919.4.3 수원군 우정면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차병한(車炳漢), 차희식(車喜植), 차병혁(車炳赫), 차인범(車仁範), 장제덕(張濟德), 이영쇠(李永釗), 김현묵(金賢默) |
| 관련 내용 |
차병한(車炳漢, 1885~1933)은 수원군 장안면 석포리 출신이다. 차병한은 차희식(車喜植)·차병혁(車炳赫)·차인범(車仁範)·장제덕(張濟德)·이영쇠(李永釗) 등과 함께 인근 주민들을 독려하여 장안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권하였다. 그는 200여 명의 시위대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지휘한 후 불어난 시위대 1,000여 명과 함께 쌍봉산에 올라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계속해서 불어난 2,000여 명의 시위대를 지휘하며 우정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집기류와 공문서 등을 소각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차병한은 차병혁 등과 함께 시위대에 앞장서서 화수리에 있던 주재소를 공격하고 도망가던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를 처단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차병한은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 및 보안법 위반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그의 공을 기려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하였다. 묘소는 장안면 석포리 산 9번지에 있다. |
| 참고 문헌 |
「김현묵 등 27인 판결문」, 1920년 12월 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소요 및 살인 방화범인 인치보고」·「피고인 차병헌 신문조서」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 1994, 221~224·239~240쪽. 「(예심조서)차병한 조서」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0, 1994, 8~11쪽. 화성시·수원대학교 박물관,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 화성시, 2003, 206~207쪽. 화성시사편찬위원회, 『화성시사』 1, 화성시, 2005, 569~580쪽.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석포리-003(임야원도_0003)」, 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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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석포리 522 |
|---|---|
|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버들안길 50(석포리 522-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소요 및 살인 방화범인 인치보고」·「피고인 차병헌 신문조서」 및 「김현묵 등 27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를 통해 현재의 위치를 비정하였다. |














